[다산 칼럼] 대선후보군, 지금부터 지켜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백인백설이 있지만, 압권은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예일대의 로버트 달 교수가 내린 정의다. 민주주의에 대해 10여 권의 책을 쓴 그는 민주주의는 “평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민들의 선호에 부응하는 정부”라고 결론지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리만치 간단해 보이는 이 정의에 민주주의의 특성과 제도가 모두 함축돼 있다.

선호의 형성과 전달을 보장하기 위해 이른바 기본권으로 알려진 각종 자유가 주어진다. 언론의 자유는 시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선호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당 활동의 보장도 같은 목적을 지닌다. ‘평등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정치적 결정에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모두 다 평등하게 고려된다는 이야기다. 이를 보증하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자유·평등·보통·비밀 선거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권자인 시민이 선호, 즉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수동적으로 여론조사에 응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있고,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가한다든가, 의원들을 접촉한다든가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주권자에게 선거야말로 선호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다.

이렇게 중요한 선거이지만, 이 귀중한 기회를 숫제 포기하거나 투표를 하더라도 후보의 자질이나 정책을 꼼꼼히 따지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는 유권자가 적지 않다. 혈연, 지연, 학연만 보고 투표하거나 ‘줄투표’를 하는 게 그런 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는 비용과 편익이 따른다. 투표같이 간단해 보이는 일에도 비용은 있게 마련이다. 후보와 정책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약간이라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투표장에 가서 줄 서서 기다리고 투표하는 그 시간에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고,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편익은 어떤가? 경쟁하는 후보 사이에 정책 차이가 크면 클수록 특정 후보에게 투표할 때 편익은 그만큼 커진다. 하지만 기대편익은 이 차이에 내가 던지는 한 표가 선거 결과에 미칠 확률을 곱해야 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유권자들은 내 한 표가 당락을 결정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적지 않은 선거구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후보와 정책에 대해 알기 위해 내는 정보비용 그리고 투표장에 가는 기회비용이 기대편익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고 기권하거나 아무렇게나 투표한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합리적 기권’, ‘합리적 무지’라고 부른다.

기권과 무지가 개인 차원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사회적 차원에서는 민주주의가 손상되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민주국가의 시민이라면 이렇게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행위는 피해야 마땅하다. 사실 큰 ‘비용’이 드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투표 참가 비용은 사전투표제로 인해 더 이상 크지 않다. 후보와 정책에 대한 정보는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지난달 30일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등록이 있었다. 모두 9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야권 후보군도 지난달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정치활동 선언으로 윤곽이 드러났다. 이들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검증은 내년 3월 선거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미리미리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만 봐도 각 후보의 사람됨이나 정책 지향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합리적인 행동이 거시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적지 않다. 투표와 선거도 그런 예의 하나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민주시민이라면 나의 선택이 사회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다. 정치 뉴스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채널을 돌리거나 건너뛰는 일만이라도 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