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美·中 갈등, 한국엔 핵심역량 확보의 문제
2021년 여름,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산업·통상·안보가 연계된 민주주의 기술 동맹의 탄생을 예고했다. 이달 초 바이든 대통령의 책상 위에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4개 분야의 공급망 검토 보고서가 올라갔다. 임기 초반 “미국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산 의존도가 높은 이들 분야의 미국 내 생산 역량 확충 방안을 요구한 바 있다. 보고서의 핵심은 중국 견제를 위해 외국 투자를 끌어들여 미국 내 생산 기반을 확충한다는 것이다.

공급망 검토 보고서와 거의 때맞춰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민주주의 동맹국과 연합해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속내를 그대로 보여줬다. 미국의 힘에만 의존하던 트럼프의 일방주의 시대가 가고 동맹과 가치를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는 바이든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은 바이든발 기술동맹에 동참할 것인가? 중국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가? 민주주의 기술동맹은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인가? 질문이 꼬리를 문다. 미·중 기술패권 각축 속에 많은 사람은 한국의 선택을 묻는다. 그러나 핵심을 비껴갔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는 어떤 기회와 위협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중국과 한국은 핵심기술에서 경쟁 관계로 돌입했다. 중국은 최종 제품 조립 단계를 이미 졸업했고, 소재와 부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글로벌 가치사슬의 한 허리를 치고 들어왔다. 중국과 한국 경제는 보완 관계를 넘어 경쟁 관계로 넘어간 지 꽤 됐다. 반도체, 배터리 모두 중국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한국이 조금 더 앞서고 있지만 그 격차는 좁혀지고 있다. 만약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지 않았다면, 즉 미국 정부가 중국을 정조준해 견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기술패권과 안보의 심각한 연계성에 대해 제대로 따져보고 전략을 세울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도식적 프레임에 사로잡혀 별 경계심 없이 중국에 거대 투자를 계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주력 제조업의 중국 투자가 커질수록,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이념을 추구하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 상호의존도는 더 커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중국이 넘볼 수 없는 초격차를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을 시장으로만 생각한다면, 한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중국을 대북 전략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생각은 한국의 좌우 모든 집권세력의 구상이었지만, 그것은 희망고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간은 입증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한국에 성찰을 요한다. 한국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한국 경제의 핵심 자산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중국 역시 그냥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반도체는 중국몽에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없이는 6G(6세대)로 넘어갈 수 없고,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을 실현하는 데 너무나 큰 비용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1980년대 일본처럼 주저앉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중국은 미국 주도 기술동맹을 와해하려 들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 제2탄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대놓고 반(反)중국 기술동맹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동맹의 약한 고리를 골라서 때린다면 그것은 곧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이 돼, 중국 대(對) 개별 국가의 다툼에서 중국 대 동맹 전체의 다툼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원치 않는 상황이다. 결국 중국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반도체 굴기를 해야 한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미·중 기술패권의 시대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선택 문제는 그럴듯하지만, 그 질문에 갇혀서는 미래로의 길이 좁아 보인다. 과장된 위협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심해야 한다. 민주주의 기술동맹의 탄생은 한국의 핵심 기술자산을 확장하고 중국과의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