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곧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에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기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같은 한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 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 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 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 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 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 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 차례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 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과일을 놓는다. 이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둘째 줄에는 채(菜)나 나물류 를 놓는데, 포(脯)는 왼편에 식혜는 오른편에 놓고, 세째 줄에는 탕(湯)을 놓는데, 다섯 가지 맛을 갖춘 탕으로 단탕(單湯)·삼탕(三湯)·오탕(五湯)· 칠탕(七湯) 등이라 하여 어탕 (魚湯)은 동쪽에 육탕(肉湯)은 서쪽에 소탕(蔬湯)은 가운데에 놓는다. 네째 줄에는 적(炙:불에 굽 거나 찐 것)과 전(煎:기름에 튀긴 것)을 벌여 놓는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이 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는데,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또 떡은 오른쪽에 면(麵)은 왼쪽에 놓는다. 세배
설날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데, 이를 세배(歲拜)라 한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일가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하러 온 사람이 어른일 때에는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이나, 아이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고 세뱃돈과 떡, 과일 등을 준다. 설빔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이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는 것이 보통이다.《열양세시기(洌 陽歲時記)》 원일(元日)조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모두 새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한다 하였다. 덕담 덕담(德談)이란, 설날에 일가친척들과 친구 등을 만났을 때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빕니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분 또는 장유 (長幼)의 차이에 따라 소원하는 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을 말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원일 (元日)조에도 설날부터 사흘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 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 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元日)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서로 축하하는 이 말을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문안비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으로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전갈(傳喝)하는데,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 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설그림[歲畵]
조선조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 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이를 ‘설그림(歲畵)’이라고 한다. 이는 축수(祝壽)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수성이란 장 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는 것이고, 직일신장은 그날을 담당한 신인데, 이는 모두 도교의 신이다. 한 사람은 도끼를, 한 사람은 절월(節鉞)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畵像)을 한자 남짓 되게 그려서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설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대문에 붙이기도 하며, 종규(鐘 )가 귀신 잡 는 형상을 그려서 문에 붙이고,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니, 이것들은 다 사기(邪氣) 와 역신을 물리치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궁가(宮家)와 척리(戚里:임금의 內戚·外戚) 집 문짝에도 붙이니,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받아 그림을 문에 붙였던 것이다. 복조리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한다.
전국에서 조리 장사가 이것을 팔기 위하여 초하루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인가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풍속은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그 수량대로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 두고 하나씩 사용하 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 신앙도 있다. 야광귀 쫓기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 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니,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청참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해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 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덩어리씩 떼어가지고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추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때 에 제물(祭物)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 양의 둥근 것을 상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 술을 마시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올린 글과 사진은 일부 인터넷에서 복사한 것입니다
1. 설의 어원
‘설’이란 이름의 유래는 3가지 정도로 전해져 온다. 먼저, 새해의 첫날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는 의미로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이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선날->설날 이렇게 연음화되었다는 설이 두번째이다. 마지막으로 삼가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명절이고 즐거운 날인 설의 의미와 동떨어진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설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 표현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니, 새해 첫날부터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2. 설의 변화
신라시대에 새해아침에 서로 축하를 하며 왕이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해와 달신에게 제사 지내었다는 기록이 있어 설을 쇤 것이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가족중심의 설은 [고려사]에 구대속절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은 4대 명절의 하나였다. 한때 1895년부터 태양력을 채용하면서 서양의 양력설과 음력설의 논쟁이 되어 일제와 광복 후 국가적인 유도로 양력설을 지정하였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대다수가 음력설을 지냄에 따라 1985년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지정되고 현재는 3일 연휴의 설날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3. 까치설날
1) 새 해(태양)가 태어나는 동지가 될 것입니다. 동지는 12월 22일입니다.
실제로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도 칭하며 동지팥죽을 먹으면 한살 더 먹는다는 풍속이 전해지고 있고, 새로 태어난 해를 맞이해서 중국에 동지사 라는 사신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2)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해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다.
이때부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그 날을 기념하지만 까치를 기념할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의 날이라 하여 까치설이라 이름 지었다.
3)이 노래가 일제시대때 만들어진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신정을 지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역기서 까치란 일본을 비유한 것이져 우리나라는 구정을 지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일본은 어제 우리는 오늘 이런식으로 노래를 지은거죠. 그시절에는 시나 가사를 만들어도 하나하나 조심해야 돼기때문에 어쩔수 없이 까치를 사용한것이져
설날 작사 : 윤 극영 / 작곡 : 윤 극영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세-요
까치설날
「설날」. 참으로 즐거운 명절이다. 한국인에겐 아마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일 것이다. 그 다음이 「추석」이 될 테고 말이다. 그런데 이 「설날」도 사실은 많은 핍박을 받아왔었다. 일제시대에도 그랬지만 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이름을 찾지 못하고 별의별 이름을 다 갖다 붙였다. 구정, 음력설, 민속의 날 등이 바로 그런 핍박의 결과에서 나온 웃기는 이름들이다.
그래도 일반서민들과 민중들은 끝까지 「설날」을 지켜내고 만 것이다. ]
박정희대통령시절엔 2중과세를 하면 공무원들은 불이익을 당했고 공장폐쇄도 불사했다. 그래서 공무원들과 국영기업체 근무자들이야 어쩔 수 없이 설날을 모른 척 했다. 그렇지만 일반공장의 근로자들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을 찾아갔고 시장의 상인들도 아예 철시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흔히들 〈삼천만의 대이동〉이라고 표현하였듯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 조상숭배의 예를 다 했다. 한해 두해도 아니고 매년 그렇게 민족의 대이동을 하니까 정치권도 현실성을 인정하고 이렇게 제대로 「설날」이란 명칭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한국의 민중의식은 참으로 대단하다.
설빔 한복. 색동옷. 때때옷. 까치저고리
설날 아침에 입는 새옷을 말하는 것
어른 : 두루마기를 비롯하여 바지, 저고리와 버선, 대님
아이 : 색동옷을 마련하고, 세배돈을 넣을 꽃주머니
떡방앗간: 길게 줄 선 떡쌀 그릇
목욕: 이발소 목욕탕 미장원
수세: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除夜), 제석(除夕), 까치설날이라고 한다. 온 집안에 등불을 밝혀놓고 잡귀를 막았는데 이를 수세(守歲)라 한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세어진다고 해서 잠자지 않으려고 윷놀이 같은 것을 한다. 잠자는 아이가 있으면 하얀 밀가루를 발라 주고 눈썹이 세었다고 놀려주기도 한다.
복조리: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조리 장수들은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며 다닌다. 그러면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쓸 조리를 사거나 식구 수대로 사서 방벽이나 부엌의 기둥에 예쁘게 잘 걸어둔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좋다. 이 복조리 안에 돈이나 엿 등을 넣는 것은 복받기를 원하는 정성의 징표이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다.복조리는 조리를 쓰는 것처럼 재물이 많이 모아지라는 마음에서 이 풍습이 생겨났다. 복조리값은 깍지도, 물리지도 않았다
차례:
세배:
세뱃돈:
덕담:
떡국: 가래떡 추억
세찬계: 북어쾌 오징어
놀이: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사르기: 그믐날 밤 또는 설날 밤에 일년동안 머리를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을 빗접에 모아 두었다가 설날 저녁에 불을 태우는 풍속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면 일년동안 병에 걸리지 않는다 했다. 이것은 신체의 미세한 부분일지라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효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야광귀(夜光鬼:양굉이) 쫓기
정월 초하룻날 밤에 야광귀(夜光鬼)이라는 귀신이 인가(人家)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린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그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흉(凶)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으며,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는데,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극장가: 긴 줄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같은 한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 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 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 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 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 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 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 차례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 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과일을 놓는다. 이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둘째 줄에는 채(菜)나 나물류 를 놓는데, 포(脯)는 왼편에 식혜는 오른편에 놓고, 세째 줄에는 탕(湯)을 놓는데, 다섯 가지 맛을 갖춘 탕으로 단탕(單湯)·삼탕(三湯)·오탕(五湯)· 칠탕(七湯) 등이라 하여 어탕 (魚湯)은 동쪽에 육탕(肉湯)은 서쪽에 소탕(蔬湯)은 가운데에 놓는다. 네째 줄에는 적(炙:불에 굽 거나 찐 것)과 전(煎:기름에 튀긴 것)을 벌여 놓는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이 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는데,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또 떡은 오른쪽에 면(麵)은 왼쪽에 놓는다. 세배
설날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데, 이를 세배(歲拜)라 한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일가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하러 온 사람이 어른일 때에는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이나, 아이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고 세뱃돈과 떡, 과일 등을 준다. 설빔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이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는 것이 보통이다.《열양세시기(洌 陽歲時記)》 원일(元日)조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모두 새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한다 하였다. 덕담 덕담(德談)이란, 설날에 일가친척들과 친구 등을 만났을 때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빕니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분 또는 장유 (長幼)의 차이에 따라 소원하는 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을 말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원일 (元日)조에도 설날부터 사흘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 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 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元日)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서로 축하하는 이 말을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문안비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으로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전갈(傳喝)하는데,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 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설그림[歲畵]
조선조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 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이를 ‘설그림(歲畵)’이라고 한다. 이는 축수(祝壽)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수성이란 장 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는 것이고, 직일신장은 그날을 담당한 신인데, 이는 모두 도교의 신이다. 한 사람은 도끼를, 한 사람은 절월(節鉞)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畵像)을 한자 남짓 되게 그려서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설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대문에 붙이기도 하며, 종규(鐘 )가 귀신 잡 는 형상을 그려서 문에 붙이고,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니, 이것들은 다 사기(邪氣) 와 역신을 물리치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궁가(宮家)와 척리(戚里:임금의 內戚·外戚) 집 문짝에도 붙이니,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받아 그림을 문에 붙였던 것이다. 복조리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한다.
전국에서 조리 장사가 이것을 팔기 위하여 초하루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인가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풍속은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그 수량대로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 두고 하나씩 사용하 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 신앙도 있다. 야광귀 쫓기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 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니,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청참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해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 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덩어리씩 떼어가지고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추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때 에 제물(祭物)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 양의 둥근 것을 상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 술을 마시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올린 글과 사진은 일부 인터넷에서 복사한 것입니다
1. 설의 어원
‘설’이란 이름의 유래는 3가지 정도로 전해져 온다. 먼저, 새해의 첫날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는 의미로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이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선날->설날 이렇게 연음화되었다는 설이 두번째이다. 마지막으로 삼가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명절이고 즐거운 날인 설의 의미와 동떨어진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설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 표현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니, 새해 첫날부터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2. 설의 변화
신라시대에 새해아침에 서로 축하를 하며 왕이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해와 달신에게 제사 지내었다는 기록이 있어 설을 쇤 것이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가족중심의 설은 [고려사]에 구대속절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은 4대 명절의 하나였다. 한때 1895년부터 태양력을 채용하면서 서양의 양력설과 음력설의 논쟁이 되어 일제와 광복 후 국가적인 유도로 양력설을 지정하였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대다수가 음력설을 지냄에 따라 1985년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지정되고 현재는 3일 연휴의 설날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3. 까치설날
1) 새 해(태양)가 태어나는 동지가 될 것입니다. 동지는 12월 22일입니다.
실제로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도 칭하며 동지팥죽을 먹으면 한살 더 먹는다는 풍속이 전해지고 있고, 새로 태어난 해를 맞이해서 중국에 동지사 라는 사신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2)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해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다.
이때부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그 날을 기념하지만 까치를 기념할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의 날이라 하여 까치설이라 이름 지었다.
3)이 노래가 일제시대때 만들어진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신정을 지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역기서 까치란 일본을 비유한 것이져 우리나라는 구정을 지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일본은 어제 우리는 오늘 이런식으로 노래를 지은거죠. 그시절에는 시나 가사를 만들어도 하나하나 조심해야 돼기때문에 어쩔수 없이 까치를 사용한것이져
설날 작사 : 윤 극영 / 작곡 : 윤 극영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세-요
까치설날
「설날」. 참으로 즐거운 명절이다. 한국인에겐 아마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일 것이다. 그 다음이 「추석」이 될 테고 말이다. 그런데 이 「설날」도 사실은 많은 핍박을 받아왔었다. 일제시대에도 그랬지만 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이름을 찾지 못하고 별의별 이름을 다 갖다 붙였다. 구정, 음력설, 민속의 날 등이 바로 그런 핍박의 결과에서 나온 웃기는 이름들이다.
그래도 일반서민들과 민중들은 끝까지 「설날」을 지켜내고 만 것이다. ]
박정희대통령시절엔 2중과세를 하면 공무원들은 불이익을 당했고 공장폐쇄도 불사했다. 그래서 공무원들과 국영기업체 근무자들이야 어쩔 수 없이 설날을 모른 척 했다. 그렇지만 일반공장의 근로자들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을 찾아갔고 시장의 상인들도 아예 철시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흔히들 〈삼천만의 대이동〉이라고 표현하였듯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 조상숭배의 예를 다 했다. 한해 두해도 아니고 매년 그렇게 민족의 대이동을 하니까 정치권도 현실성을 인정하고 이렇게 제대로 「설날」이란 명칭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한국의 민중의식은 참으로 대단하다.
설빔 한복. 색동옷. 때때옷. 까치저고리
설날 아침에 입는 새옷을 말하는 것
어른 : 두루마기를 비롯하여 바지, 저고리와 버선, 대님
아이 : 색동옷을 마련하고, 세배돈을 넣을 꽃주머니
떡방앗간: 길게 줄 선 떡쌀 그릇
목욕: 이발소 목욕탕 미장원
수세: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除夜), 제석(除夕), 까치설날이라고 한다. 온 집안에 등불을 밝혀놓고 잡귀를 막았는데 이를 수세(守歲)라 한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세어진다고 해서 잠자지 않으려고 윷놀이 같은 것을 한다. 잠자는 아이가 있으면 하얀 밀가루를 발라 주고 눈썹이 세었다고 놀려주기도 한다.
복조리: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조리 장수들은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며 다닌다. 그러면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쓸 조리를 사거나 식구 수대로 사서 방벽이나 부엌의 기둥에 예쁘게 잘 걸어둔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좋다. 이 복조리 안에 돈이나 엿 등을 넣는 것은 복받기를 원하는 정성의 징표이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다.복조리는 조리를 쓰는 것처럼 재물이 많이 모아지라는 마음에서 이 풍습이 생겨났다. 복조리값은 깍지도, 물리지도 않았다
차례:
세배:
세뱃돈:
덕담:
떡국: 가래떡 추억
세찬계: 북어쾌 오징어
놀이: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사르기: 그믐날 밤 또는 설날 밤에 일년동안 머리를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을 빗접에 모아 두었다가 설날 저녁에 불을 태우는 풍속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면 일년동안 병에 걸리지 않는다 했다. 이것은 신체의 미세한 부분일지라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효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야광귀(夜光鬼:양굉이) 쫓기
정월 초하룻날 밤에 야광귀(夜光鬼)이라는 귀신이 인가(人家)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린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그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흉(凶)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으며,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는데,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극장가: 긴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