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은 돈벌이에 무심…머릿속엔 '극일'과 '초일류'뿐이었다"
“이 회장은 돈벌이엔 관심 없는 사람이었어요. 매출과 영업이익 얘기를 꺼내면 혼쭐이 났죠.”

이건희 회장과 함께 삼성그룹을 진두지휘했던 전직 삼성 최고경영자(CEO)들 얘기는 한결같았다.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개발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내세웠던 고 이병철 선대회장 이상으로 사회와 국가의 앞날에 우선순위를 뒀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에서 12년간 CEO로 일한 윤종용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은 이 회장을 ‘혁신 전도사’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 회장과 관련,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 혁신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한 분”이라며 “삼성병원을 세우고 스포츠 행사를 후원하고 호암상을 제정하는 등 우리 사회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힘썼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이 어떤 바람이 있었을 것 같냐는 질문엔 “혁신을 지향하는 기업인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꿨을 것”이라고 답했다.

삼성의 TV 사업을 글로벌 1위로 끌어올린 윤부근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회장을 ‘큰 화두’를 던진 위인으로 기억했다. 삼성이 TV 사업에서 고전했던 2000년대 초반 얘기를 꺼냈다.

“당시 잘나가던 반도체에서 150명이 넘는 인력이 왔어요. 처음엔 이게 진짜인가 싶었지요. 반도체 담당부서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를 써서 매달린 결과가 ‘TV 왕국 삼성’입니다. 2006년에 대수, 2007년에 금액으로 글로벌 1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윤 전 부회장은 “이 회장은 기술의 흐름을 알고 큰 화두를 던지는 인물이었다”며 “후배 경영자들에게 ‘멀리 보고 크게 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인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 역시 이 회장을 선견지명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이 4MB D램을 처음 내놓은 1988년 당시를 회고하며 “경쟁사들이 밑으로 뚫어 반도체 칩을 만드는 ‘트렌치’ 방식을 고집할 때 삼성만 위로 쌓는 ‘스택’ 방식을 썼다”며 “당장은 어렵지만 확장성이 좋다는 이 회장의 결정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D램은 4MB, 16MB, 256MB로 발전했는데 트렌치 방식을 쓰던 업체들이 전부 망하고 삼성만 남았다.

진 회장은 “이 회장은 미래에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를 오래 고심한 뒤 의사결정을 내렸다”며 “후배 경영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으로 삼성증권 사장 등을 지낸 황영기 한미협회 회장은 이 회장을 ‘집념의 사나이’로 기억했다. 황 회장은 “이 회장은 처음 그룹을 맡았을 때 ‘극일’,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른 이후엔 ‘초일류’란 목표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며 “한국 시장의 경쟁구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 무대에서 초일류를 목표로 뛰다보면 매출이나 이익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며 “후배 경영자들도 이 회장처럼 큰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송형석/황정수/고재연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