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사라지자 '동전 왕국' 흔들…풍산, 11년 만에 적자
‘동전과 총알의 왕국’으로 불리며 탄탄한 실적을 자랑하던 풍산이 ‘시대의 변화’ 앞에 흔들리고 있다. 모바일 결제가 늘면서 세계 동전 수요가 급감하고, 총알 역시 세계 무력충돌이 줄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주력 상품인 신동(伸銅) 판매도 글로벌 경기 악화에 따른 구리 가격 하락으로 고전하고 있다.

2013년 이후로 실적 감소

3일 전자공시 등에 따르면 풍산은 지난 1분기 연결기준으로 1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풍산의 분기 손실은 2009년 1분기(54억원 영업적자) 후 11년 만에 처음이다. 풍산은 지난해 같은 기간 158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매출은 5802억원에서 5811억원으로 소폭 늘었지만 수익성은 되레 나빠졌다.
현금 사라지자 '동전 왕국' 흔들…풍산, 11년 만에 적자
풍산의 실적 감소세는 2013년 매출 3조원을 찍은 뒤 지속되고 있다. 그해 풍산의 매출은 3조220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이익도 1331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매출과 이익이 매년 하락세를 보이며 지난해 매출은 2조4513억원으로 6년 전의 80% 수준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411억원에 그치며 2013년의 30%에 그쳤다.

실적 악화의 첫째 요인은 동전이 안 팔려서다. 풍산은 한때 세계 소전(素錢: 동전에 무늬를 새기기 전 상태의 제품)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전 세계에 동전을 공급해왔다. 동전사업은 풍산 매출의 10% 정도로 크진 않지만, 이익률이 높아 ‘캐시카우(현금창출원)’로 통했다.

하지만 신용카드 사용이 보편화되고 스마트폰 보급에 따른 모바일 결제가 늘면서 ‘현금 없는 사회’가 도래하자 세계 중앙은행들은 동전 발주를 줄였다.

한국은행은 올 9월부터 편의점, 마트에서 결제 시 거스름돈을 계좌에 곧바로 입금해주는 서비스까지 출시하기로 했다. 풍산의 소전 매출은 국내와 태국법인을 합해 2013년 2371억원에서 지난해 1876억원으로 감소했다. 세계 소전 시장 점유율도 이 사이 51%에서 39%로 낮아졌다.

풍산의 또 다른 수익원인 총알 판매 역시 국지전 등 세계 무력충돌이 줄고, 최대 무기 시장인 미국 수요가 감소해 부진에 빠져 있다. 국내에서도 20대 인구 감소로 병력자원이 줄면서 영향을 받고 있다. 풍산의 방산 부문 매출은 2017년 8366억원에서 2018년 7002억원, 지난해 6052억원으로 매년 1000억원가량 감소하고 있다.

풍산 매출의 다른 주력산업인 신동 부문도 미·중 무역분쟁과 글로벌 경기 둔화로 지난해 매출(1조1026억원)이 전년보다 12% 감소했다. 신동은 구리나 구리합금을 가공해 판, 대, 관, 봉 등을 제조할 때 쓰인다. 자동차 전자제품 조선 기계 등의 부문과 관계가 깊어 글로벌 경기를 가늠하는 대표 상품으로 풍산 전체 매출의 약 60%를 차지한다.

신사업 성과는 수년째 부진

풍산도 이 같은 추세를 읽고 류진 회장의 지시로 2011년 비철금속업계 최초로 연구소(풍산기술연구원)를 설립했다. 기존 주력 산업에만 매달려선 안 되고, 첨단소재산업을 기반으로 세계적 전문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취지다.

2016년부터는 전기자동차 부품과 2차전지 소재 사업에도 진출을 시도했다. 전자부품을 연결하는 커넥터 투자를 늘리고, 항균동과 어망용 동합금 제품 등의 개발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성공 사례로 이어지진 않고 있다. 풍산 관계자는 “전기차 소재 등 신사업 부문에서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없지만 꾸준히 지속할 것”이라며 “각종 바이러스·세균을 차단하는 항균동 분말 사업도 최근 시작해 100억원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풍산은 일단 올해 방산 수주에 집중할 계획이다. 최근 중동 업체와 지난해 방산 수출 실적의 71%에 해당하는 957억원의 소구경탄약 공급 계약을 맺었다. 시장에서는 미국 내 총기 구매 급증, 중동 내 탄약 수입 증가에 따라 풍산의 올해 방산 수출이 2000억원을 넘어서며 지난해보다 700억원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의 영향을 바로 받는 풍산의 실적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당분간 안 좋을 수 있다”며 “신사업 분야의 성과를 통해 얼마나 빨리 체질 개선을 이뤄내느냐가 풍산의 과제”라고 말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