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궁지로 몰리는 WHO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히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지금 한국인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당연한 말씀!”이라고 반응할 것이다. 1인당 GDP가 3만달러를 웃도는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는 상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만성 영양부족에 온갖 질병이 횡행하는 저개발 사회라면 이 말을 얼마나 이해할까.

건강에 대한 이 규정은 1946년 국제보건회의에서 채택된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 있는 내용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흔이 곳곳에 폐허처럼 남아 있고, 식민지에서 갓 독립해 아무것도 없는 신생국이 쏟아지던 빈곤기 인류의 선언이었던 점을 돌아보면 지금도 예지가 돋보인다. 이 헌장을 바탕으로 “전 세계가 최상의 건강수준에 도달하자”며 발족한 유엔 전문기구가 WHO다. 작고한 이종욱 박사가 2003년 6대 사무총장에 선출돼 한국인에게도 친숙하다.

‘코로나19’와의 싸움에도 WHO가 있다. 하지만 방역과 치료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이 이끄는 현 집행부의 친중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에티오피아 외교부·보건부 장관을 지낸 그는 중국 우한에서 이번 전염병이 일어났을 때부터 중국 입장을 거들었다. 전염경로 논쟁 등에서 표나게 중국 정부 편을 들었던 데다 WHO 차원의 ‘팬데믹 선언’도 늦어 국제공조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까지 들었다.

지난주 미국이 WHO 유지 분담금을 내지 않겠다고 발표한 배경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거칠고 직설적인 WHO 비판에는 미국 내부의 정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닷새 만에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이 WHO를 옹호하면서 사실상 트럼프 공격에 나섰다. 미국이 이 정도에서 그칠까. 통상·기술 전쟁을 벌여온 미국과 중국이 코로나 발병과 확산 원인을 놓고 계속 다투면 WHO 입장도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WHO의 또 하나 장애물은 국제기구 전반에 퍼져있는 ‘관료주의’일 수 있다. 유엔과 산하기관에 NGO(비정부기구) 수준의 ‘월급쟁이’가 적지 않다는 ‘국제관료 비판론’이 대두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고비용에다, ‘인류 발전’이라는 설립 취지에 맞게 일을 못 한다”는 쓴소리가 WHO만 겨냥한 게 아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