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황촉매 첫 국산화
"R&D 조직 하나로 합쳐라"
2010년 사장 취임하자마자
중앙기술연구원 설립 지시
차세대 먹거리 발굴 '특명'
2010년 8월 권오갑 당시 현대오일뱅크 사장(현 현대중공업지주 회장·사진)은 취임 후 열린 첫 임원회의에서 각 사업장에 흩어져 있는 연구 조직을 합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구 조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연구원들은 주로 석유제품 품질을 단순 검사하는 일을 했다. 차세대 먹거리를 찾기 위해서는 유명무실한 연구 조직을 통합하고 연구개발(R&D)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권 회장의 판단이었다.
다음해인 2011년 현대오일뱅크의 중앙기술연구원이 설립됐다. 그로부터 10년 뒤 현대오일뱅크는 국내 정유사로는 처음으로 ‘경유 탈황촉매 국산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반기엔 자체 개발한 촉매를 자사 정유 공정에 투입한다. 6조원 규모의 세계 정유촉매 시장도 공략할 계획이다.
국내 첫 ‘경유 탈황촉매’ 개발
지난 13일 경기 용인시 마복동 현대오일뱅크 중앙기술연구원에서 만난 김철현 원장은 “경유 생산에 쓰이는 탈황촉매의 안전성 테스트를 최근 완료했다”며 “중소기업과 협력해 양산 단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길이 1~1.15㎜, 두께 0.8~1㎜. 스파게티 면을 잘게 부순 것처럼 보이는 촉매는 원유 속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에서 들여온 원유에는 황이나 금속 성분이 뒤엉켜 있다. 촉매를 넣어 걸러내야 한다. 특히 수소와 만나면 황을 황화수소 가스로 변화시키는 탈황촉매는 경유 중질유 등의 품질과 수율을 결정하는 핵심 소재다.
국내 정유사들은 그동안 촉매를 일본과 미국에서 전량 수입해 왔다. 현대오일뱅크만 해도 촉매 구입에 연 2000억원 정도를 쓴다. 국내 정유 4사의 촉매 수입액은 1조원에 육박한다. 김 연구원장은 “정유 공정에서 촉매가 반응을 잘못 일으키면 공장 전체를 한 달 가까이 ‘셧다운’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촉매 시제품 성능을 시험하려면 실제 공정에 투입해야 하는데 오작동할 경우 연쇄적인 피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생산량(CAPA) 기준 세계 10위권에 드는 국내 정유 4사가 지금까지 국산 촉매 개발에 엄두를 내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충남 대산공장을 ‘테스트베드(시험·검증 시설)’로 활용했다. 이곳에 실제 공정을 20만분의 1, 100만분의 1로 축소한 시험설비를 갖췄다. 지난 9년간 수십만 번의 테스트가 이뤄졌다. 그 결과 기존 제품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은 15% 이상 낮춘 경유 탈황촉매 개발에 성공했다. 현대오일뱅크는 2~3년 내 중유·나프타 탈황촉매도 개발해 동남아시아와 중동에 수출할 계획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는 세계 정유촉매 시장 규모가 2025년 55억달러(약 6조7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잘될 때 더 멀리 보자”
현대오일뱅크 중기원이 촉매 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 2014년 2분기 업계엔 불황이 찾아왔다. 유가 급락으로 정제마진이 줄어든 영향이었다. 정유사들은 대부분 적자로 돌아섰다. 현대오일뱅크만 394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남미 등으로 원유 수입처를 다각화하고 설비 고도화에 미리 투자한 결과였다.
권 회장은 “잘될 때 내일을 대비하자”며 중기원에 신사업 발굴을 지시했다. 경쟁사에서 촉매 기술 전문가도 영입했다. 올초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 규제 강화에 맞춰 출시한 저유황 선박유 ‘현대스타’도 이 무렵 개발을 시작했다.
중기원의 역할은 최근 더 주목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정유 업황은 크게 악화됐다.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중기원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초대 중기원장을 지낸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사장은 매주 수요일마다 연구원들과 대산공장에 내려간다. 정유 공정을 직접 보면서 공정 효율화 기술과 신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연구원장은 “비산유국 정유사는 국제 정세에 따라 실적이 출렁일 수밖에 없다”며 “안정적 사업구조를 갖추기 위한 신사업 발굴에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용인=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