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전시회 취소 사태가 전시장과 전시주최사 간 위약금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행사 취소로 수억원의 임대료를 통째로 날릴 처지인 전시주최사는 전시장 측에 "임대료를 환불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전시장은 "계약 규정상 환불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임대 권한을 쥔 전시장이 고사 직전에 몰린 업계 현실을 외면한 채 원칙만 내세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최사 "임대료 일부라도 환불해달라"
한국전시주최자협회에 따르면 4월까지 전국 15곳 전시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시회 80여 건이 취소됐다. 전시주최사와 전시디자인, 서비스 회사 등 업계가 입은 피해액만 3000억원이다. 이 가운데 전시주최사가 전시장에 낸 임대료는 250억원 안팎 수준이다. 임대 계약상 전시장 임대료는 행사 시작 1~2개월 전까지 전액을 납부하도록 돼있다.
전시주최사는 전시장 측에 '동업자 정신'을 이유로 임대료 환불을 요구하고 있다. 전체 업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최악의 위기에 맞닥뜨린 만큼 고통을 분담하자는 것이다. 최근 전국 곳곳으로 퍼지고 있는 '착한 임대인' 분위기도 전시주최사의 환불 요구에 힘을 싣고 있다.
전시주최사가 참여기업과 맺은 계약 규정상 코로나19와 같은 불가항력에 의한 행사 취소는 출품료를 환불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대부분 전시주최사는 출품료를 환불하거나 차기 행사로 이월시켰다. 코로나19 사태로 타격을 입은 참여기업의 피해를 최소화기 위해서다.
이병윤 한국전시주최자협회 전무는 "사실 출품료를 1년 뒤에 열릴 행사로 넘기는 것은 환불과 똑같다"며 "그로 인한 피해를 주최사가 모두 떠안은 상황인 만큼 전시장도 임대료 환불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시장 "우리도 코로나19 사태 피해자다"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입기는 전시장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취소가 결정된 400건이 넘는 행사 외에 300건이 넘는 행사가 연기되면서 주 수입원인 임대수입 감소가 불보듯 뻔한 상황이다. 장소를 파는 전시장 입장에서 행사일정 연기는 '윗돌을 빼 아랫돌을 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킨텍스 관계자는 "이미 하반기 임대가 꽉 찬 상태지만 대부분이 연기 행사로 채워져 임대수입 증가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연간 수십개 전시회와 컨벤션을 직접 여는 일부 전시장은 전시주최사와 마찬가지로 행사 취소·연기로 큰 타격을 입었다. 코엑스는 이달 들어서만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 서울리빙디자인페어 등 4개 전시홀 전관을 사용하는 대형 전시회가 취소됐다. 이로 인한 피해만 41억원 규모다. 국제그린에너지엑스포를 연기한 대구 엑스코는 자체 행사 취소, 연기로 인한 피해액이 22억원에 달한다. 고양 킨텍스, 부산 벡스코도 수십억원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부산 벡스코 관계자는 "전시장도 직·간접적으로 수백억원의 피해를 입었는데 마치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처럼 비춰져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시간 두고 결정하자" vs "한시가 급한 위기다"
전국 15개 전시장 가운데 인천 송도컨벤시아, 수원컨벤션센터,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등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11곳은 이미 지난달 임대료 전액 환불 방침을 세웠다. 반면 코엑스와 킨텍스, 벡스코, 엑스코 등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 중인 4곳은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코엑스는 한국무역협회, 킨텍스는 경기도와 고양시,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그리고 벡스코는 부산광역시, 현대건설 컨소시엄과 코트라, 엑스코는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대구은행과 대구백화점 등 지역기업이 주주다. 대형 전시장 관계자는 "임대료 환불 여부는 이사회에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며 "운영회사인 전시장이 자의적으로 입장을 정할 경우 자칫 배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대형 전시회가 몰린 코엑스가 임대료 환불 이슈로 전시주최사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코엑스는 임대료 환불 여부와 규모 등 세부 방침을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환불 여부와 규모 등을 결정하려면 전시장이 입은 피해를 고려해야 하는데 지금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에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한 중견 전시주최사 대표는 "1년을 공들여 준비한 행사들이 졸지에 줄취소 사태를 맞아 전시업계 전체가 벼랑 끝 위기에 몰렸는데 전시장은 주주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정을 미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선우 기자 seonwoo.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