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시대 한·일 관계는 통교와 침략, 통상과 약탈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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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순도 낮은 은 유통에 조선 인삼교역 중단으로 단호히 대응
왜란 이후에도 왜공(倭供)으로 고초…국학진흥원 웹진 담 9월호
"교류와 단절이 반복한 한일관계, 임진왜란 이후 국교를 회복하자 왜공(倭供)으로 고초를 겪는다.
"
한국국학진흥원은 '쩐의 전쟁 : 왜관편'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9월호를 펴냈다고 13일 밝혔다.
왜관(倭館)은 조선 시대 때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거주ㆍ통상을 하던 곳이며 왜공은 일본 사신 접대나 일본과 무역에 쓰는 여러 가지 물품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최근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를 함으로써 두 나라 무역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이다.
이에 조선 시대 일기에서 볼 수 있는 일본과 무역, 대일관 등 자료들에서 일본과 관계를 고민하고, 경제 독립도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를 기획했다고 한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전근대 시대 한국과 일본 관계는 통교와 침략, 통상과 약탈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통교와 통상을 단절하면 얼마 뒤에는 침략과 약탈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도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들 소요가 문제가 돼 꽤 오래도록 두 나라는 교류를 끊었다.
이는 임진왜란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두 나라 관계는 임진왜란으로 최악 상황을 맞았고 기나긴 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종전 이후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다시 교류를 이어간다.
1609년(광해군1) 조선은 주변 이민족을 제어해야 했고, 일본은 이웃 나라에서 필요한 물산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류 재개에 경제 이유가 강했던 일본은 조선에 좀 더 많은 것, 좀 더 품질이 좋은 것을 요구한다.
왜란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 백성에게 조선과 일본이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인 왜공을 충당하는 것은 매우 버거웠다.
조선 중기 문인인 김령은 왜공을 마련하기 위해 겪는 백성 고초에 대한 동정과 왜공을 마련하려고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 비판을 문중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 기록했다.
당시 조선은 왜란으로 불구대천 원수가 된 일본과 교류를 맺어야 할 만큼 주변 이민족들에게서 큰 위협을 받았다.
무엇보다 큰 위협은 북쪽 여진족이었다.
조선 변경 지역은 여진 여러 부족 전쟁터가 됐다.
여진 여러 부족을 통합한 건주여진은 후금(後金)을 세우고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 재침을 두려워해 요청을 들어주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1627년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에 일본은 접대 수준 격상과 한양으로 상경을 요구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중단한 공목(公木·일본과 공식 무역에서 일본 사신이 가지고 온 개인 상품 대가로 내주던 무명)까지 달라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직후에는 조선에 통신사 파견과 인조 어필을 요청한다.
조선은 남북으로 이민족들 위협을 받고 있던 터라 일본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번 호란을 겪은 조선을 상대로 일본은 막대한 경제 이익뿐만 아니라 명분까지도 받아낸다.
주변국 위협은 그대로 백성에게 고통으로 전달되면서 전쟁 참화와 수탈은 백성 몫이었다.
이후 점차 안정을 찾은 조선은 그동안 일본이 보인 행태에 문제를 제기한다.
상거래에서 부당거래·부당이득, 왜관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일본인 각종 범죄 행위, 조선 염탐 활동 등이 그것이다.
영화 '조선명탐정2 : 사라진 놉의 딸'에 나오는 왜관 풍경과 영화 '나랏말ㅆ`미'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승려들 무리한 요구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기록에 근거한 창작이다.
두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조선은 일본 행태에 제재를 가한다.
이 가운데 대표로 꼽는 사례가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는 특별한 화폐다.
은 순도를 조작해 부당이득을 취하려던 일본에 조선은 인삼 수출을 거부했다.
다급한 일본은 조선과 인삼 무역을 위해 특별한 은을 주조한다.
인삼대왕고은이란 화폐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일본 교란에 조선 정부가 선택한 것이 순도가 낮은 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삼 수출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상대가 잘못 던진 공을 받지 않고 되받아쳐 얻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조경란 9월호 웹진 편집장은 "인조와 숙종대에 조선과 일본 관계를 보면 결국 위정자들 대외 정보력과 분석력, 나라 힘이 외교 관계 관건으로 보인다"며 "그 힘은 결국 백성 노고를 줄여주고 외부 환란에서 백성을 지키는 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왜란 이후에도 왜공(倭供)으로 고초…국학진흥원 웹진 담 9월호
"교류와 단절이 반복한 한일관계, 임진왜란 이후 국교를 회복하자 왜공(倭供)으로 고초를 겪는다.
"
한국국학진흥원은 '쩐의 전쟁 : 왜관편'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9월호를 펴냈다고 13일 밝혔다.
왜관(倭館)은 조선 시대 때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거주ㆍ통상을 하던 곳이며 왜공은 일본 사신 접대나 일본과 무역에 쓰는 여러 가지 물품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최근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를 함으로써 두 나라 무역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이다.
이에 조선 시대 일기에서 볼 수 있는 일본과 무역, 대일관 등 자료들에서 일본과 관계를 고민하고, 경제 독립도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를 기획했다고 한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전근대 시대 한국과 일본 관계는 통교와 침략, 통상과 약탈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통교와 통상을 단절하면 얼마 뒤에는 침략과 약탈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도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들 소요가 문제가 돼 꽤 오래도록 두 나라는 교류를 끊었다.
이는 임진왜란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두 나라 관계는 임진왜란으로 최악 상황을 맞았고 기나긴 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종전 이후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다시 교류를 이어간다.
1609년(광해군1) 조선은 주변 이민족을 제어해야 했고, 일본은 이웃 나라에서 필요한 물산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류 재개에 경제 이유가 강했던 일본은 조선에 좀 더 많은 것, 좀 더 품질이 좋은 것을 요구한다.
왜란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 백성에게 조선과 일본이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인 왜공을 충당하는 것은 매우 버거웠다.
조선 중기 문인인 김령은 왜공을 마련하기 위해 겪는 백성 고초에 대한 동정과 왜공을 마련하려고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 비판을 문중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 기록했다.
당시 조선은 왜란으로 불구대천 원수가 된 일본과 교류를 맺어야 할 만큼 주변 이민족들에게서 큰 위협을 받았다.
무엇보다 큰 위협은 북쪽 여진족이었다.
조선 변경 지역은 여진 여러 부족 전쟁터가 됐다.
여진 여러 부족을 통합한 건주여진은 후금(後金)을 세우고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 재침을 두려워해 요청을 들어주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1627년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에 일본은 접대 수준 격상과 한양으로 상경을 요구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중단한 공목(公木·일본과 공식 무역에서 일본 사신이 가지고 온 개인 상품 대가로 내주던 무명)까지 달라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직후에는 조선에 통신사 파견과 인조 어필을 요청한다.
조선은 남북으로 이민족들 위협을 받고 있던 터라 일본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번 호란을 겪은 조선을 상대로 일본은 막대한 경제 이익뿐만 아니라 명분까지도 받아낸다.
주변국 위협은 그대로 백성에게 고통으로 전달되면서 전쟁 참화와 수탈은 백성 몫이었다.
이후 점차 안정을 찾은 조선은 그동안 일본이 보인 행태에 문제를 제기한다.
상거래에서 부당거래·부당이득, 왜관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일본인 각종 범죄 행위, 조선 염탐 활동 등이 그것이다.
영화 '조선명탐정2 : 사라진 놉의 딸'에 나오는 왜관 풍경과 영화 '나랏말ㅆ`미'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승려들 무리한 요구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기록에 근거한 창작이다.
두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조선은 일본 행태에 제재를 가한다.
이 가운데 대표로 꼽는 사례가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는 특별한 화폐다.
은 순도를 조작해 부당이득을 취하려던 일본에 조선은 인삼 수출을 거부했다.
다급한 일본은 조선과 인삼 무역을 위해 특별한 은을 주조한다.
인삼대왕고은이란 화폐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일본 교란에 조선 정부가 선택한 것이 순도가 낮은 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삼 수출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상대가 잘못 던진 공을 받지 않고 되받아쳐 얻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조경란 9월호 웹진 편집장은 "인조와 숙종대에 조선과 일본 관계를 보면 결국 위정자들 대외 정보력과 분석력, 나라 힘이 외교 관계 관건으로 보인다"며 "그 힘은 결국 백성 노고를 줄여주고 외부 환란에서 백성을 지키는 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