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사진)은 17일 “일본이 기술 우위를 무기로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들고 있다”며 “세계 경제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라고 말했다. 이날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현대경제연구원과 한국경제신문사가 공동 개최한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다.

유 본부장은 “각국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각자 필요한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경제 발전에 기여해 왔다”며 “일본이 기술 우위를 무역분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행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일본산(産) 소재·부품에 의존하는 나라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며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적극 공론화하겠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일본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토론 참가자들의 지적에는 공감했다. 그는 “외교적 해법을 포함해 미래를 위한 진정성 있는 대화는 있어야 한다”며 “수차례 협의를 제안한 만큼 (일본의) 호응을 기대한다”고 했다.

자유무역협정(FTA) 추가 체결과 관련, 유 본부장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과 연내 FTA를 타결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완료되면 태국 베트남을 포함해 아세안 상위 5개국과 모두 FTA를 체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인교 교수 "한·일 관계 정답 두고 왜 빙빙 도나"
유명희 본부장 "日 호응 있어야 대화 가능"


유명희 "日의 기술 무기化, 국제사회 지지 못받을 것"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17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면서도 “상대방(일본)의 진지한 호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날 국장급 양자협의를 열자는 내용의 서한을 일본 정부에 발송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 위해 오는 24일까지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도 밟고 있다. 내각 결정을 거쳐 공포일로부터 21일이 지나면 한국은 화이트리스트에서 완전히 제외된다. 전략물자 1100여 개 품목이 포괄허가 방식에서 개별허가로 전환되고 통관 절차가 까다로워진다.

유 본부장은 “일본은 신뢰관계 훼손과 부적절한 사안(북한으로의 반출) 등 논리를 바꿔가며 수출규제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조치는 ‘자유롭고 비차별적이며 예측 가능한 통상 환경을 조성한다’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오사카 선언문의 정신에 정면 배치된다”며 “일본은 의장국으로서 선언문을 채택한 직후 어떤 사전 협의나 통보도 없이 수출규제를 발표했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부가 중장기 대책만 내놓고 있어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적극 방어했다. 유 본부장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자체가 국제적 공론화의 기회가 된다”며 “일본 조치가 국제법 위반이란 점을 인정받는 수단이 될 수 있는 데다 비슷한 사례의 재발을 막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본부장은 통상 문제뿐만 아니라 핵심 소재·부품의 국산화 등 체질 개선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의 협상력은 통상담당자 개인의 자질뿐 아니라 그 나라의 기술 경쟁력에서 나온다”며 “정부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면서 동시에 우리 부품·소재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유명희 "日의 기술 무기化, 국제사회 지지 못받을 것"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한·일 모두 대화를 말하는데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일본은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관해 얘기하자’고 하는데 우리는 ‘통상 분야를 논의하자’는 식이다. 정답이 있는데 답만 빼고 다른 데로 빙빙 돌려 말하고 있는 꼴이다. 진정성 있는 대화 의제를 마련해야 한다.

▷유 본부장=통상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잘 안다. 정부는 외교적 해법을 포함해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다만 상대방도 진지하게 호응해야 한다.

▷장윤종 포스코경영연구원장=일본 산업계와도 긴밀하게 협의해야 한다. 부모가 싸운다고 자식들까지 싸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한·일 양국이 성숙한 관계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 본부장=민간 측면에서 한·일 간 교류는 열어놔야 한다. 올 3월 본부장이 된 뒤 국내에 투자한 외국인기업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꾸준히 접촉해왔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를 먼저 만났고 올 하반기에도 이런 교류를 이어갈 계획이다.

▷장 원장=일본 정부의 ‘코리아 패싱’은 중국 산업에만 이득이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중·일 협력이 강화되면 미국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다. 미국에 “도와달라”가 아니라 “이번 조치는 아시아 판도에서 미국의 입지를 좁힌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유 본부장=조만간 미국 방문을 하려고 검토 중이다. 일본이 기술 우위를 무기로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드는 상황이 세계 경제에 어떤 위험이 되는지 적극 알릴 것이다.

▷이동근 현대경제연구원장=미국은 언제 갈 예정이고 누구를 만날 것인가.

▷유 본부장=지난주 많은 분이 미국에 다녀왔다. 그분들이 주로 정무외교라인을 통했다면, 저는 경제논리를 들고 경제·산업계 인사를 만나기 위해 일정을 조율 중이다.

▷허노중 전 코스닥위원회 위원장=한·일 간 경제전쟁이 일어났는데 정부가 말하는 대책은 대부분 중장기적이고 원론적이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가.

유명희 "日의 기술 무기化, 국제사회 지지 못받을 것"
▷유 본부장=진부한 얘기지만 카드는 공개하는 순간 더 이상 카드가 아니다. ‘WTO 절차가 몇 년씩 걸리고 효과 없는 것 아니냐’ ‘상소위원 7명 중 네 자리가 공석인데 제대로 돌아가겠느냐’는 지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WTO 제소 자체가 국제적 공론화 기능을 한다. 일본 조치의 국제법 위반을 인정받는 유효한 수단이고 비슷한 사례의 재발을 막는 효과도 있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한국 정부 안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품목을 예상하는 ‘롱리스트’를 갖고 있었고 정확하게 품목도 맞혔다는 발언이 나왔다. 정확하게 예측했다면서 지금까지 어떤 준비를 했고 그간의 성과는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유 본부장=한국 정부는 대일(對日)의존도가 높은 품목의 수입처 다변화와 국내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지금 시작한 것이 아니다. 대체국을 찾고 국내 생산능력 신증설을 서두르는 절차를 이미 하고 있었다. 다만 테스트하는 데만 몇 개월씩 걸리고, 개별 기업활동이라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김인철 성균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일본은 외국인직접투자(FDI) 분야 등에서도 주요한 경제적 파트너다. 우리가 ‘강 대 강’으로 대응하면 경제나 관련 산업 고용을 망가뜨릴 수 있다.

▷유 본부장=일본과 과거사 문제는 과거사대로 논의하면서 미래를 위한 경제협력은 차분하게 계속 진행돼야 한다. 12일 양자협의도 우리가 먼저 만나자고 했고 이후 국장급 협의를 제안하며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김 교수=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세계 통상 환경이 ‘제로섬 게임’으로 바뀌었다. 한국 정부의 대응책이 필요하다.

▷유 본부장=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의 성향이 아니다. 세계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제조업이 미국을 떠났고 ‘러스트벨트’ 등 지역사회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나온 중산층의 좌절과 분노가 오랫동안 축적됐다. 앞으로도 보호무역주의 기조는 계속될 것이다. 어떤 체제에서도 한국을 지킬 수 있도록 통상교섭본부가 역할을 해나가겠다.

▷정 교수=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이용한 국가 간 교역활동인 ‘디지털 통상’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무역 대상이 노동·기술·자본에서 데이터처리 기술로 바뀌고 있는데 한국은 각종 규제로 우리가 설 땅을 스스로 좁혔다. 세계에서 데이터 공유 산업이 한국만큼 어려운 나라가 어디 있나.

▷유 본부장=한국은 WTO 전자상거래 협상에 공식 참여하는 등 새로운 디지털 통상규범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되 소비자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방안’을 놓고 부처 간 치열한 논쟁이 있다.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디지털 통상 환경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조재길/구은서/서민준 기자 road@ha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