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에 전시된 조슈아 레이놀즈의 에드먼드 버크 초상화.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에 전시된 조슈아 레이놀즈의 에드먼드 버크 초상화.
‘아웃사이더’ ‘또라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 후보로 뛰기 시작했을 때 공화당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공화당이 내세운 가치들을 그는 존중하지 않았다. 사실 트럼프는 자신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뒤 “내가 (엘리트주의적이던) 공화당을 일하는 남성과 여성을 위한 정당으로 바꿨다”(2018년 12월 타임지 인터뷰)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포퓰리스트일까? 전형적인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으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의 페론당처럼 퍼주기식 복지를 앞세우진 않았지만 기존 공화당 지도부에 비하면 트럼프는 상당히 대중 지향적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알고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말이 되든, 되지 않든 표가 되는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포퓰리즘이 진보의 전유물?…뿌리는 보수와 가깝다"
미국의 공화당도, 한국의 자유한국당도 포퓰리즘적인 정책이 좌파 진영의 전유물인 것처럼 공격할 때가 많다. 하지만 미국의 우파 싱크탱크로 꼽히는 후버연구소 소속 피터 버코위츠 선임연구원(사진)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원래 포퓰리즘적이다. 트럼프를 뜨악하게 바라보는 공화당원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잊은 사람들이란 얘기다.

버코위츠는 시티저널 최신호에 기고한 ‘보수주의와 대중(Conservatism and the people)’이란 글을 통해 보수주의의 포퓰리즘적 뿌리를 짚었다. 18세기 말 대표적인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모든 평범한 사람이 정치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강조하며 전통과 공동체는 그 안에서 발전하고 번성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신보수주의의 대부로 통하는 어빙 크리스톨은 1985년 월스트리트저널에 아예 ‘뉴 포퓰리즘’이라는 칼럼을 썼다. 크리스톨은 이 칼럼에서 미국 정치인과 관료들이 1960년대 대중의 관심사에 지속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격분해 등장한 것이 뉴 포퓰리즘이라고 지적했다.

크리스톨은 뉴 포퓰리즘은 ‘통치하는 엘리트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하는 것’이라며 평소에는 포퓰리즘을 반대할 사람들이 이런 기류에는 동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조건적인 대중추수주의, 대중영합주의와 다른 의미에서 포퓰리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이후 미국 현대사에서 보수주의에 대한 지지는 포퓰리즘을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고 버코위츠는 진단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노동자 계층과 종교집단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아버지 부시로 불리는 조지 H W 부시는 포퓰리스트 정치인 로스 페로에 공화당 표를 빼앗겨 재선에 실패했다. 아들인 조지 W 부시는 포퓰리스트 랠프 네이더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표를 잠식해 당선됐다. 2010년 공화당은 포퓰리즘적 세력인 티파티의 등장으로 하원 다수당 자리를 꿰찼고,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은 그야말로 포퓰리즘의 승리였다.

어떤 가치가 지켜야 할 전통인가에 관한 판단은 대중이 결정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버코위츠는 보수주의가 대중, 그리고 포퓰리즘과 필연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미국 공화당의 엘리트들은 트럼프가 발견한 그 지점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수주의 엘리트들은 사람들의 열망, 불만,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자유민주주의 공화정에서 정치인은 이런 자질을 갖춰야 한다. 정치는 사람들의 불만을 인지하고, 받아 안고, 좀 더 세련되고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되는 형태의 정책으로 바꿔야 할 책임이 있다. 대책 없는 주장을 마구 늘어놓는 종류의 포퓰리즘을 옹호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대중에게 귀를 기울이는 근대 정치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버코위츠의 지적은 유효하다.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는 흔히 부정적인 말로 들린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포퓰리즘이라면 보수엔 지금 좀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