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분기

영국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1926~2010)은 세계 각 지역 각 시대의 1인당 소득수준을 추계했다. 그에 의하면 15세기까지 세계는 평등했다.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의 중국이 서유럽보다 조금 더 잘 살았다. 16세기 이후 서유럽이 중국을 추월했다. 서유럽과 그로부터 뻗어난 지역이 세계를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과 여타 세계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평등한 세계가 불평등한 세계로 갈라졌다. 이 대분기(大分岐)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인가.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 탄생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공간이 대분기의 원동력이었다.

대분기의 철학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그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누구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는다. 그 인간이 자연에 노동을 가해 취득한 재산은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권리다. 하느님은 자연을 기기묘묘하게 창조해 인류의 공유물로 주셨다. 이는 인간이 서로 개방하고 통상하라는 섭리다. 개방과 통상은 분업과 과학을 초래해 문명을 발전시킨다. 개방과 통상은 세계 평화와 공영의 길이다. 문호를 닫고 백성을 노예로 부리는 나라는 쇠퇴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독립정신》

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했다. 한성감옥에 있던 이승만은 그 소식을 듣고 《독립정신》이란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전쟁이 끝나면 조선은 두 나라 중 어디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조선은 숨이 거의 넘어가는 중환자다. 다시 일어설지 의심스러운 종족이다. 큰 고기는 작은 고기를, 작은 고기는 송사리를 먹는 아수라 사회다. 소수의 양반이 노예근성의 백성을 갈취하는 왕조다. 도덕이 타락해 온 하늘 아래 사기와 거짓말이 난무한다. 어찌해서 이 지경이 됐는가.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동포에 전하고자 미친 듯이 붓을 날려 4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 《독립정신》이다. 자유와 독립은 근로, 저축, 개방, 통상, 분업, 경쟁, 과학, 기술진보, 나아가 사해동포(四海同胞)다. 그리하여 자유는 문화다. 책의 곳곳에서 이승만은 마르틴 루터,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임마누엘 칸트, 토머스 제퍼슨의 주의·주장을 재생하고 있다. 감옥생활이 강요한 독서와 사색과 기도의 축복이었다. 《독립정신》은 불과 29세의 저자가 이미 완숙한 경지의 자유주의 사상가임을 입증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그 말년에 거둔 가장 풍성한 지적 성취였다.

역사의 주류

1904년 8월 이승만은 5년 7개월 만에 출옥했다. 연후에 미국 하원의장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밀사로 파견됐다.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는 행운도 누렸다. 임무를 수행한 이승만은 1910년 8월까지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취득했다. 영어가 탁월한 데다 서유럽과 미국의 철학에 정통한 지력이기에 가능한 위업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이 중립 의무에 충실한 한 전쟁을 수행하는 어느 국가도 미국의 상선을 검문, 검색할 수 없다는 미국의 주장이 국제법으로 성립해 가는 19세기 역사를 추적한 것이다. 논문은 탁월했으며, 프린스턴대는 이를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대학 총장 우드로 윌슨은 이승만을 장차 그의 민족을 구원할 선지자로 지목했다.

윌슨은 이후 미국 대통령이 돼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했다. 통상은 전시하에서도 부정될 수 없는 자연권이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추구한 그 정신은 윌슨 대통령에 이르러 민족자결주의의 선포와 국제연맹의 설립으로 표출됐다. 장차 세계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끌 역사의 주류였다. 장차 한국 민족이 자유인으로 동참할 세계사의 주류였다. 이승만은 그 주류에 접신했으며, 동포를 그 길로 인도했다.
1920년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부임을 환영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1920년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부임을 환영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영광과 오욕

이승만의 화려한 이력은 진작에 그를 ‘신화에 가린 인물’로 만들었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얼마 있지 않아 임시정부는 심각한 분쟁에 휘말렸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성립할 국제연맹이 한국의 완전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에서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해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미국과 같은 ‘중립적 상업지역’으로 변해 모든 나라가 혜택을 본다는 취지였다. 그 일은 세계의 자유인이 후진 민족을 위해 아직 시도한 적 없는 참신한 과제였다. 크게 보아 역사는 이승만의 청원대로 흘렀다.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해 3년간 통치했으며, 국제연합의 결의와 승인으로 대한민국이 독립했다. 그 길이 세계사의 주류였다. 그러하기에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격분했다. 신채호 등 54명은 이승만의 청원을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삼아달라”는 매국·매족 행위라고 성토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도다.” 그들은 이승만이 작성한 청원서를 읽지 않았으며, 읽더라도 그 뜻을 이해할 만한 지성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적대감은 소문과 선동으로 퍼져나갔다. 이승만은 사과를 거부했다. 임시정부는 분열했으며, 1925년 남은 세력은 임시대통령을 탄핵했다.

독립의 정세와 방략

1905년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할 당시 외교관 복장을 한 이승만.
1905년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할 당시 외교관 복장을 한 이승만.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그날’에 이뤄진다고 믿었다. 한국의 멸망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열강의 공조하에 이뤄진 일이다. 그런 국제적 공조가 깨지지 않은 한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은 없다. 그 공조체제는 언젠가 깨질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이 아니다. 자유통상의 나라가 아니다. 자신을 신의 나라로 여기는 가운데 아시아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날’이 언제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온다. 독립 정세에 관한 이승만의 판단은 이와 같았다.

그럼 ‘그날’이 오기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일이다. 망국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세계로부터 잊히는 것이다. 줄기차게 일본의 한국 병합과 그에 협조한 미국 외교가 저지른 불의와 불공정을 고발해야 한다. 우리의 빼앗긴 자유를 돌려달라고 외쳐야 한다. 다음은 합심 단결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교육하고 실업해 동포사회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드디어 ‘그날’이 오면 “우리의 대포와 우리의 비행기로 왜적에 선전포고하는 것은 만국공법이 허락하는 우리의 권리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한두 사람이 권총과 폭탄으로 적의 수괴 몇 사람을 해친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뭉쳐야 한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중심으로 군대식 규율로 단결해야 한다. 독립 방략에 관한 이승만의 주장은 이와 같았다.

‘그날’이 오다

일본의 미국 공격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1941년).
일본의 미국 공격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1941년).
이승만과 대립한 독립운동세력은 이승만의 방략을 ‘외세 의존의 허무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날’을 환상이라고 일축했다. 그렇지만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941년 8월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의 충돌이 임박함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를 출간했다.

4개월 뒤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승만의 경고를 예사롭게 넘긴 미국인은 경악했다. 그 사람이 오래전부터 해온 이야기가 진실임을 깨달았다. 미국이 지핀 불씨가 결국 미국을 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었다. 미국은 한국 독립을 태평양전쟁의 한 가지 목적으로 삼았다. 1943년 카이로선언이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해”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렇게 빚어진 미국인의 대(對)한국 책무감의 발로였다. 이승만이 소리쳐온 ‘자유의 길’이었다.

20세기 전반 한국인의 정신은 전통 소중화주의, 그로부터 변이한 민족주의, 소련에서 유입한 공산주의, 일제가 강요한 동화주의, 미국에서 들어온 자유주의의 갈래로 분열했다. 그 대립이 너무 심해 아직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자유의 길’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