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3·1운동 100주년, 기억해야 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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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동 문화선임기자
![[선임기자 칼럼] 3·1운동 100주년, 기억해야 할 이](https://img.hankyung.com/photo/201901/07.14247643.1.jpg)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습격해 무차별로 살상, 파괴한 ‘4월 참변’ 때 선생은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지만 선생의 삶이 주목받은 건 최근에 와서다. 지난해 가을 답사를 주관했던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국비와 자체 예산을 보태 선생이 순국한 우수리스크 소베스카야 언덕 인근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순국 99주기인 오는 4월께 기공식을 한다니 더욱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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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의암 손병희다. 의암은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을 이은 천도교의 3세 교조였다. 당시 천도교는 교인 300만 명의 최대 종단이었다. 경술국치 후 10년 안에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한 의암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을 앞세워 독립운동을 추진했고 별도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기독교는 물론 불교, 유림 등 각 종교를 망라해 손을 잡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가 16명, 기독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천도교의 교세는 극도로 위축됐다. 서울 경운동에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를 짓는다며 교인들로부터 걷은 건축성금 500만원 가운데 30만원만 건축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대부분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했던 천도교의 위국헌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은 것은 단지 위축된 교세 때문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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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삶, 얼마나 알고 있나
산포수 출신의 홍범도 장군, 북간도 항일운동의 중심지 ‘명동촌’을 일군 ‘간도 대통령’ 김약연 선생, 압록강 건너 단둥에서 무역선박회사를 운영하며 김구, 김가진, 김원봉 등 숱한 독립 영웅을 상하이로 실어나른 영국인 조지 L 쇼….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도 이름이나 알면 그나마 다행일 뿐 구체적인 삶에 관해서는 무지한 게 솔직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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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의 삶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친일인명사전’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항일인명사전’이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1만5000여 분의 삶이 정리돼 있긴 하지만 보다 쉽고 널리 읽히고 공유되는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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