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100년 전 파리의 김규식
딱 100년 전인 1919년 1월18일, 프랑스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처리 문제를 논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27개국 대표가 모인 이 회의는 6월28일까지 이어졌다. 주요 결정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5개국에 의해 이뤄졌다.

이 회의에서 세계 지도가 바뀌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독립국이 됐다. 그러나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승전국이었다. 김규식을 필두로 한 우리 대표단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주최국인 프랑스도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미국 역시 “우리가 전범을 응징하면 정의의 징표가 될 것”이라는 말만 했다.

김규식은 주저앉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내고 각국 인사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르주 클레망소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서한도 전달했다. 정부 각료들에게는 “우리의 독립 요구가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당신의 지지 편지가 소중한 힘이 되고 있다”며 연대를 호소했다.

현지에서 임시정부 외무총장 임명장을 받은 그는 대한민국 통신국을 개설하고 ‘독립 홍보물’을 제작해 세계 각국에 보냈다.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8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 천재’의 감각이 이 과정에서 빛났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한국 문제에 무관심한 서구 열강의 태도에 울분을 토했다.

그러자 유럽 언론이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김규식의 파리외신기자클럽 연설을 보도한 프랑스 신문은 “4000년이 넘는 역사의 독립국가였다가 지금 일본의 속박 아래 꼼짝 못 하고 떨고 있는 2000만 영혼의 간청에도 성의 있게 답하지 않는 프랑스에 그는 경악했다”고 썼다. 이 자리에 있던 프랑스 의회 의원과 중국 베이징대 교수, 전 러시아 의회 의장 등 60여 명이 그의 연설에 감동해 한국 지지 의사를 밝혔다.

당시 파리에는 식민국에서 건너온 독립투사들이 많았다. 김규식은 9세 아래인 베트남 청년 호찌민과도 만났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끼리의 동병상련으로 호찌민에게 중국신문의 미국 특파원 인터뷰를 주선하기도 했다. 호찌민은 김규식에 감읍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계획을 그대로 따랐다. 프랑스 신문에 한국 독립을 응원하는 글도 실었다.

김규식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에 알려졌고, 26년 뒤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남북 통합을 외치던 그는 안타깝게도 6·25 때 납북돼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이후에는 정치적 회오리 속에 남과 북에서 다 잊혀졌다. 그의 공적이 인정돼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된 것은 1989년이었다. 파리 특사로 파견된 지 70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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