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을 준비하는 고깃배에서 어구를 챙기는 어부의 모습
출항을 준비하는 고깃배에서 어구를 챙기는 어부의 모습
섬뿐일까! 삶을 대신 살 수 없듯이 삶의 고통 또한 대신 체험할 수 없다. 삶은 살아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섬들을 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완도의 섬 대모도는 200여 명이 살지만 구멍가게 하나 없다. 무더운 여름에도 남들 다 사먹는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을 수 없다. 과자 한 봉지, 라면 하나도 쉽게 구할 수 없다. 생필품은 하루 두 번뿐인 여객선을 타고 완도로 나가 사오거나 여객선편에 완도의 상회로 주문해서 받아야 한다. 하지만 툭하면 끊기는 뱃길 때문에 그마저 쉽지 않다.

교통 단절은 겨울이 가장 극심하다. 지난겨울 대모도는 여객선이 다닌 날이 한 달 평균 9일 정도에 불과했다. 겨울 3개월 동안 30일도 채 배가 못 다녔다. 1주일에 잘해야 하루 이틀 배가 뜬 것이다.

섬 주민 교통권 악화로 고통 심해

성벽처럼 웅장한 대모도 모동리 민가
성벽처럼 웅장한 대모도 모동리 민가
봄도 다르지 않았다. 툭하면 안개 때문에 배가 안 떴다. 완도에서 13㎞ 거리에 불과하지만 섬은 오지 낙도다. 대모도 해역은 청산도보다 가까운 바다에 속해 있지만, 더 먼 섬인 청산도에는 배가 다니는데도 대모도는 배가 못 뜨는 날이 허다하다.

대모도는 낙도 보조항로다. 사람이 적게 사는 섬들만을 순회하는 마을버스 같은 작은 여객선이 국가 보조를 받아 다닌다.

보길도·청산도 사이 기다림의 섬
면적 4.15㎢ 면적에 200여 명이 살아가는 대모도는 완도군 청산면에 속한 섬이다. 인접한 소모도와 함께 모도로 통칭된다. 대모도에는 모동리, 모서리 두 개의 마을이 있고 소모도는 모북리라 한다. 주민들이 동리라 부르는 모동리에 면출장소와 보건진료소, 우편취급국 등의 행정 관청이 몰려 있다. 노인당으로 가는 길, 동리 노인들이 잠시 마을 정자에 둘러앉았다. 87세의 서강례 할머니는 본 이름이 넘예다. 강례는 호적 이름. 22세에 서리에서 시집와서 내내 동리에만 살았다. 할아버지가 이승을 뜨신 지는 8년째다. “잘 갔제라. 둘이나 살아 있으면 얼마나 성갔겠소. 자식들만 성가시제.”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셨는데 그도 모자라 지금도 오로지 자식들 걱정이다. 갑자기 근처에서 까마귀가 운다. “저 까마구는 누구 데려갈라고 우냐. 미자야 좀 물어봐라.” 할머니는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툭 던져놓고 또 한 말씀. “나 데려갈라고 우는 갑다.” 할머니들은 모두 호미처럼 등이 굽으셨다.

대모도 겨울철 대표 음식은 삼치죽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대모도 민박집 밥상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대모도 민박집 밥상
섬마을의 점심시간. 모도 동리 주민들 20여 명이 다들 노인당에 모여 공동 식사를 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주민들은 함께 밥상을 나눈다. 오늘은 오리 두 마리로 죽을 끓였다. 오리죽 한 그릇씩에 더위도 거뜬하다. 섬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섬 살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처럼 서로 살피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리죽을 먹은 대모도의 겨울철 공동체 음식은 삼치죽이다. 이 바다가 삼치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청산도에 삼치 파시가 서기도 했다. 지금도 가을부터 봄까지는 모도 바다가 삼치잡이 어선들로 흥청거린다. 삼치잡이 나간 마을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삼치를 선물하면 다들 노인당에 모여 삼치죽을 끓여 먹으며 논다. 삼치만 푹 삶은 뒤 뼈는 골라내고 거기에 쌀과 마늘, 파만 넣고 푹 끓여 먹는다. 그보다 더한 보양식이 따로 없다.
작은 파도에도 툭하면 끊기는 작은 여객선
작은 파도에도 툭하면 끊기는 작은 여객선
모도는 띠 모(茅)자를 쓰는 그 이름처럼 띠가 많았다. 실제로 예전 재래식 김 양식을 많이 하던 시절에는 모도의 띠가 효자 상품이었다. 완도 김 양식 어민들은 대부분 모도의 띠를 사다가 김을 말리는 도구인 발장을 만들었다. 지금은 플라스틱 발장이 나와 더 이상 띠의 효용이 없어졌다. 띠는 또 지붕을 덮는 재료로도 이용됐는데 초가지붕이 1년 간다면 띠로 엮은 지붕은 10년도 갈 정도로 방수가 잘됐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생각나게 하는 섬마을 우편배달부
영화 ‘일 포스티노’를 생각나게 하는 섬마을 우편배달부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시작된 공도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대모도는 1620년에 마씨와 방씨가 다시 입도하면서 사람살이의 맥이 이어졌다. 모서리 마을 회관 뒤편에서 선사 유물이 발견됐는데, 토기와 청자, 녹청자편들이었다.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모서리 마을 뒤편에는 구들장 논도 남아 있다. 구들장 논은 청산도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대모도, 여서도 등 여러 섬들에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해초 채취로 생계 이어가는 노인 섬

하염없이 여객선을 기다리는 대모도 주민들
하염없이 여객선을 기다리는 대모도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 가구뿐인 섬은 여전히 농사일이나 해초 채취로 생계를 이어간다. 섬에는 소득이 높은 양식업을 하는 주민이 많지 않다. 동리는 김 양식 1가구, 서리는 양식업이 좀 더 많다. 그래 봐야 서리도 전체 56가구 중 7가구다. 양식 가구들은 김, 미역, 다시마, 전복 등을 길러 큰 소득을 올린다. 미역과 다시마는 주로 전복의 먹이로 길러진다. 양식업이 가능하니 서리에는 젊은 사람들도 더러 있다. 부모가 하던 양식장 사업에 도시 나가 살던 자식들을 불러들여 같이하거나 물려주기 때문이다.

같은 섬이지만 동리가 상대적으로 양식업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큰 바다로 면한 지형적 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 지향의 풍토 때문이기도 하다. 모험과 안정, 지형과 문화적 풍토의 차이가 기질적인 차이를 만들었고 종사하는 직업군을 다르게 했다. 동리 주민 자녀들 중에서는 공무원이 많이 나왔다. 반면 서리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 두 마을의 차이는 귀향인들의 면목에서도 차이가 난다. 양식업을 할 수 있으니 서리는 주로 젊은 층이 귀향해서 보다 활기찬 반면 동리는 공무원 출신들이 정년퇴직 후 귀향하는 일이 많아 동네가 상대적으로 차분한 편이다.

그래서 두 마을의 노인들도 기질이 상반된다. 동리 할머니들은 잠시도 노는 법이 없다. 뙤약볕에 나가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일개미처럼 살아온 일생이다. 노인들은 그토록 어렵게 길러낸 작물을 이고지고 가서 자식들에게 보내준다. 오로지 자식들을 위한 삶이다. 반면 서리 노인들은 즐기며 살자 주의다. 젊어서 고생했으니 늙어서는 아등바등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항일운동 거세게 펼친 곳 대모도

보길도·청산도 사이 기다림의 섬
작은 섬이지만 대모도는 항일운동이 거셌던 곳이다. 서훈자만 6명이나 된다. 모도 항일운동의 근거지는 1921년 서리에 세워진 개량서당, 모도원숙이었다. 소안도의 사립소안학교가 그랬던 것처럼 모도원숙은 항일의식의 배양장이었다. 1923년 9월에는 모도원숙을 지원하는 것을 명분으로 모도 배달청년회가 세워졌다. 배달청년회는 모도 항일운동의 실행 조직이었다. 모도 배달청년회의 서기였던 서재만 선생(1904∼1984)은 항일운동의 핵심이었다. 배달청년회의 회의가 열릴 때마다 선생은 애국가와 혁명가를 합창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게 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고 모도원숙 학생들에게도 애국가를 가르치며 민족 독립사상을 심어줬다.

항일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 선생은 결국 경찰에 체포됐고, 1926년 6월29일 칙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일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앞장섰던 항일의 섬. 그 후예들은 국가로부터 합당한 예우를 받고 있을까. 실상 모도 섬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무슨 대단한 예우나 특별한 혜택이 아니다. 그저 육지 사람들의 절반만이라도 기본권을 누리고 살게 해 달라는 것이다.

보길도·청산도 사이 기다림의 섬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