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100엔=1000원 시대의 '축복'
지난 8월 숨 막히는 폭염에 날아든 소식 하나. 터키 리라화 폭락으로 해외 명품을 반값에 사들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속된 말로 “남의 고통은 나의 행복”이라고 했던가. 리라화는 기어이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터키만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러시아 루블화, 인도 루피화도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미국 경제 호황에 따른 달러화 강세가 신흥국에 쓰나미처럼 밀려든 것이다. 앞서 브라질 헤알화와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일찌감치 그로기 상태였다. 베네수엘라는 아예 나라 간판을 내려야 할 지경에 놓였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 외채가 많고 정부 부문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국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의 달러화 강세는 신흥국 통화에 너무 가혹하다.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도 없다. 자국 금리를 큰 폭으로 올려도 외국인 투자자들은 앞다퉈 달러를 회수하고 있다. 이미 계산이 끝났다. 미국 경제는 더 달릴 것이고, 신흥국 통화는 지금보다 더 떨어질 것이다. 어차피 시간은 외국인 편이다. 나중에 통화가치가 바닥일 때 다시 들어와 헐값에 널려 있는 주식과 부동산, 기업들을 쓸어 담는다는 판단이다.

신흥국들은 야속해 할 것이다. 하지만 타국의 호황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게 환율 게임의 잔인한 속성이다. 환율은 철저하게 상대적이다. 천장도 바닥도 없다. 100 대 1의 교환비율이 10 대 1, 아니면 1000 대 1로 갈 수도 있다. 한쪽의 경제적 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나면 다른 한쪽의 통화는 지옥을 맛보도록 돼 있다. 미국 경제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모른다. 올 들어 세 차례 금리를 올린 미 중앙은행(Fed)은 이미 지옥도를 그려 놓았다. 연말에 한 차례, 내년에 세 차례 정도 추가로 금리를 인상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자산인 미 국채는 그만큼 싸진다. 신흥국들로선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리라화 폭락을 남의 일처럼 여겼던 한국인들이 반드시 궁금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다. 징검다리 연휴를 즐기기 위해 지난 8일 휴가원을 내고 일본으로 3박4일짜리 관광을 다녀온 수만 명도 마찬가지다. 한국 원화가치는 왜 과거처럼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연유로 ‘100엔=1000원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세 가지다. 국제 경쟁력을 갖춘 수출 기업, 경상수지 장기 흑자, 재정건전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장률이다. 이런 조건이 사라지면 4000억달러를 자랑하는 외환보유액도 모래성에 불과하다.

최근 《그리스인 이야기》를 완간한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20대에 맨주먹으로 떠난 지중해 여행을 이렇게 회상했다. 도쿄 올림픽(1964년)이 끝난 직후 시작한 여행이었다. “1달러가 360엔으로 정해져 있던 시절이었어요. 돈이 없어 선원들의 일을 거들어주는 조건으로 공짜 배를 타고 다녔어요. 지구를 절반 가까이 도는 데 9년이나 걸린 것은 일본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종횡무진하며 유럽 지성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야기꾼도 젊은 날의 고단함을 차마 낭만적으로 포장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환율은 국가적 자부심과 국민 삶의 질과 직결돼 있다. 미국과 일본이 잘살면 한국도 잘살아야 한다. 혹여 중국이 흔들리면 그 충격을 견뎌 낼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이 달러화 초강세에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것은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 남았을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우리 경제가 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어렵게 확보한 국가적 역량을 잘 보존하고 키워서 해외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낭패를 겪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