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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일훈 논설위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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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일훈 칼럼] 60년대생의 퇴장…2026 재계 임원인사의 전말

    기업 인사에 ‘나이 파괴’라는 용어가 본격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 새로운 밀레니엄이 개막할 때였다. 일본 제조업이 65세를 정점으로 하는 연공서열 기업문화에 갇혀 아날로그적 타성을 버리지 못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50대 초·중반 경영자들을 과감하게 발탁해 디지털 전환을 이끌었다. 그 결과가 세계 최고 효율의 자동화 설비와 정보처리 속도였다.당시 일본은 아날로그적 설비와 종신고용으로 수요 대비 너무 많은 제품을 만들고 너무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초과 설비 해소가 대규모 실업을 초래할까 산업 체질 전환을 미루고 또 미뤘다.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남아도는 설비를 해외로 내보냈다. 그 공장들도 아날로그였다. 2005년, 일본 최고 기업 소니는 그렇게 삼성전자에 전자왕국 자리를 넘겨줬다. 당시 삼성의 54세 최지성 사장이 이끌던 TV사업 부문 명칭은 ‘디지털미디어’였고, 소니 최고경영자(CEO)는 68세 이데이 노부유키였다.나이가 젊다고 세상 변화를 능동적으로 탐색하고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불확실성과 복잡성이 도사리는 현대 기업조직에선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변화를 둘러싼 정보·지식에 대한 접근성은 지위가 높은 장년층에 훨씬 유리하다. 오랜 세월 단련하고 축적한 지혜와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인사철마다 세대교체를 외치며 인적 쇄신을 한다. 그래야 스스로 변한다고 느낀다. 올 연말은 더욱 유난스럽다. 주요 기업 임원 인사에서 60년대생이 일거에 밀려났다. 70년대생을 넘어 80년대생이 핵심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SK하이닉스조차 거두절미하고 60년대생을 대거 집으로

    2025.12.10 17:43
  • [조일훈 칼럼] 李 대통령, 국민통합도 대미 협상처럼 솜씨 발휘하길

    이재명 정부는 천운을 타고났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숙적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이라는 헛발질로 모든 것을 망쳐놓은 바람에 기저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경기 침체 국면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반도체 특수 덕에 내년 무역수지와 세수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확장 재정에 따른 부담을 한결 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율 안정과 금리 인하 여력도 기대할 수 있다. 경제계가 극구 반대해온 상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개정 노조법)도 국회 통과를 관철해 지지층에 대한 약속도 어느 정도 이행한 상태다. 그런 여유가 최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고리 2호기 계속운전 허가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운만 따라준 것은 아니다. 대미 관세·안보 협상은 집권 초 이재명 대통령의 진짜 실력이 드러날 시금석 무대였다. 아쉬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가 봐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일본의 대미 협상과 비교해보면 투자 방식과 조건의 유리함이 더욱 돋보인다. 일본은 5500억달러 전액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내에 모두 투입해야 하는 반면 우리는 트럼프 임기 만료 연도인 2029년 1월까지 투자처를 선정하게 돼 있다. 대미 투자 총액 3500억달러 가운데 연간 최대 부담액도 200억달러로 낮췄다. 투자처 결정을 위한 미국과의 사전 협의 조건도 우리 측이 훨씬 낫다.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이 대통령의 고집과 배짱이 주효했기 때문으로 본다. 만약 한·일 양국의 타결 내용이 정반대였다면 난리가 났을 터다.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최대 고비를 무난하게 넘어서면서 강력한 국정 동력을 확보하게 됐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와 유사시 핵전력으로도 개발 가능한 우라늄 농축 및 사용

    2025.11.17 17:32
  • [조일훈 칼럼] 대한민국의 보물들

    반도체 착시는 이중적 언어다. 우리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취지로 쓰이지만 반도체가 없는 나라들이 보기엔 부럽기 짝이 없는 걱정일 뿐이다. 대만의 대들보 TSMC를 보라. 누구도 대만의 반도체 편중을 지적하지 않는다. TSMC가 중국의 상시적 위협에 시달리는 대만의 구세주 같은 존재이듯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대한민국의 국보급 자산이다.코스피지수가 역사적 4000 고지를 밟았다. 1년 전만 해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봉우리다. 그 절반의 공은 반도체 몫이다. 지난해 인공지능(AI) 투자 붐을 타고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먼저 달리더니 올 하반기부터는 삼성전자가 메모리 슈퍼사이클에 올라탔다. 한때 적자였던 반도체 사업부가 대규모 흑자 구조로 돌아선다고 하니 투자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허리띠를 졸라매며 내실을 키운 데 따른 정당한 보상이다.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 출범 일성으로 ‘아베노믹스 시즌2’를 외치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대한민국의 보물상자를 열어본다. 양적 완화니, 확장 재정이니 떠들어도 똘똘한 기업 하나 키우는 것만 못하다. 일본 산업이 한국보다 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세계 1위 자동차기업 도요타도 건재하다. 하지만 수출에서 첨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일본의 두 배다. 반도체산업의 격차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이끄는 자동차산업도 일본을 턱밑까지 따라잡았다. 2020년 미국의 한국 자동차 수입액은 211억달러, 일본 차 수입액은 410억달러였다. 더블 스코어 수준이던 격차가 지난해 454억달러(한국) 대 512억달러(일본)로

    2025.10.28 17:21
  • [조일훈 칼럼] 대출·보증, 통화스와프도 해결책 아니다

    3500억달러 vs 5500억달러.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요구한 투자금액이다. 이 숫자가 어디에서 나왔을까를 따져봤다. 여러 가지 계산을 해본 결과 양국이 지난 5년간 미국을 상대로 거둬들인 경상수지 흑자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의 대미 경상수지 흑자는 3520억달러, 같은 기준 일본의 흑자는 81조3000억엔(약 5400억달러)에 달했다. 공교로운 우연일 수도 있지만, 미국이 지난 4월 세계 각국에 상호관세율을 책정한 단순 공식을 떠올려보면 이런 심증을 거두기도 어렵다. 당시 미국은 자국의 상품수지 적자를 상대국에서 수입한 총금액으로 나눠 숫자를 뽑아낸 뒤 이 비율을 절반으로 잘라 관세율을 책정했다. 대(對)한국 관세율 25%는 그렇게 매겨졌다. 왜 이런 기준을 사용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근거는 없었다. 세계적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조차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주먹구구식이었다.만약 3500억달러를 책정할 때 5년 치 경상수지를 대입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대단히 부당한 것이다. 한국의 대미흑자 3500억달러는 상호 이익에 따른 거래의 결과다. 미국 정부의 지원이나 소비자들의 시혜로 얻은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장에서 소비자 후생을 극대화하며 얻어낸 과실이다. 더욱이 대미 수출로 번 돈을 모조리 한국으로 들여온 것도 아니다. 번 돈의 상당 부분을 현지에 재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 기업들의 대미 직접투자 잔액은 2400억달러에 육박한다. 여기에 이번 관세 협상 전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이 개별적으로 약속한 미래 투자액만 1500억달러다. 또 하나 짚어봐야 할 대목은 1조달러에 이르는 금

    2025.10.15 17:30
  • [조일훈 칼럼] 기업 수난 시대…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기업들의 내년도 사업계획은 오리무중이다. 한 해도 쉽게 넘어간 적이 없지만 올가을은 유난히 괴롭고 막막하다. 울산과 포항, 여수 산단의 불 꺼진 공장 너머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살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중국 제조업의 의기양양한 진격과 자율주행차, 휴머노이드로봇의 현란한 변주를 보면서 한숨을 쉰다. 외롭고 불안하다. 공단 인근 밥집과 노래방의 맥 빠진 상인들, 얇아진 월급봉투를 받아 든 근로자들의 한숨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기업 바깥의 시간은 무심히 흐른다. 얼핏 세상은 잘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맛집엔 언제나 삼삼오오 청춘들의 긴 줄이 늘어서고 인천공항은 사상 최대 여행객들로 분주하다. 누군가 위기를 말하고 앞날의 위태로움을 얘기하지만, 각자의 천국과 각자의 지옥을 사는 사람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지난 한 해만 3만 개의 제조업체가 사라졌다. “인간도 하나의 우주”라는 생명의 존귀함으로 보자면 한때 누군가의 고용과 생계를 책임지며 별처럼 빛나던 기업들이었다. 자영업은 무려 100만 곳이 문을 닫았다. 일자리 없는 사람들이 부나방처럼 뛰어들고 퇴출당하는 악순환이 펼쳐진다.많은 전문가가 높은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을 지목한다. 하지만 근본적 문제는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저임금 수준의 근로자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는 새벽배송 젊은 쿠팡맨들의 고단함을 생각해보라. 그렇게 밤새워 배달을 하면 나중에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그들에게 일자리를 위협받는 대형마트 근로자들도 모두 최저임금이다. 우리 경제 생산성은 왜 이렇게 낮은 것일까. 이 와중에 주 4.5일제를 걸고 총파

    2025.09.24 17:44
  • [조일훈 칼럼] 美 건설 현장의 체포·구금 사태를 보고

    미국은 제조업을 할 수 없는 나라다. 근로 인력부터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3억5000만 명 인구에서 제조업 종사자 수는 1280만 명에 그친다. 전체 인구의 3.6%로, 440만 명의 제조인력을 보유한 한국(8.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근로자 임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균 시급 4만원이 넘는다.여기에 노동자들의 고령화까지 겹쳤다. 한국도 비슷한 사정이긴 하지만, 미국 청년들은 더 이상 공장에서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현지 언론들조차 “미국 청년들이 안락함에 스포일돼 있다”고 꼬집는다. 수십 년에 걸쳐 제조업 주도권이 아시아로 넘어오는 사이에 기술 생태계도 거의 붕괴된 상태다. 첨단산업의 건설·제조인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이 와중에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바닥 현장을 받치던 외국인 근로자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미국 정부의 한국인 근로자 체포·구금 사태는 배덕적이다. 자신들의 제조업 부흥에 투입된 사람들을 중범죄자 소탕하듯이 능멸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배신감 이면에는 미국을 상대로 한 응석받이식 태도도 없다고 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기업들과 정부의 책임도 크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직원들을 내보낸 기업이나 지난 십수년간 이런 상태를 방치한 외교당국의 무사안일은 자업자득의 소지가 분명하다. 미국이 동맹국 사정을 알아서 봐주겠거니 하는 따위의 만심이었을 것이다. 비자 규정을 착실히 지켜온 일본 기업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분노와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몇 가지 근본적 문제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무리해가면서까지 미국에 투

    2025.09.10 17:41
  • [조일훈 칼럼] '저력의 한국기업'도 감당못할 노란봉투법

    처음 봤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지난 24일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차갑고 딱딱하게만 비치던 투사의 환호는 기업들의 탄식과 극명하게 엇갈렸다.노란봉투법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돼 온 이 법의 정식 명칭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법률안’이다. 일반인에겐 생소하고 전문적인 내용이어서 웬만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노란봉투법이라는 약칭은 2009년 쌍용자동차 노조의 불법파업에 대해 법원이 47억원의 배상을 결정하자 시민단체 등이 노란 봉투에 성금을 모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일에 따스한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프레임 구축에 능한 좌파들의 기교 덕이다.이번에 개정된 3조는 노조 불법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대폭 제한하고 있다. 기업이 수백,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었더라도 노조나 조합원들의 경제상태 등을 따져 당사자들이 감내할 만한 수준으로 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불법파업에 대한 기업 차원의 억지력은 간단히 해제됐다. 하지만 기업들에 더 심각한 문제는 ‘사용자성 확대’를 담은 2조 개정안이다. 원래 노란봉투법은 3조를 중심으로 논의되다가 뒤늦게 2조 개정안이 얹힌 구조다. 2010년 현대중공업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촉발됐다. 현대중공업이 사내하청 노조 활동에 개입한 사건(지배개입 부당노동행위)에서 대법원은 “근로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는 자는 사용자로 본다”고 판시했다. 원청이 하청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았더라도 ‘실질적

    2025.08.26 17:27
  • [조일훈 칼럼] 광복 80년, 피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마친 뒤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이가 흔들렸다”고 했다. ‘일 잘하는 대통령’ ‘유능한 정부’를 내건 마당에 초강대국의 일방통행 앞에서 ‘국력’이라는 단어를 고통스럽게 곱씹었을 것 같다.내일은 광복 80주년. 국가적 소회가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후 동아시아의 패자(霸者)는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유럽 문명의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은 오래전에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발명하고도 근대국가로의 변태(變態)에 실패한 중국을 압도했다. 봉건적 거대 아시아와 근대 유럽의 대충돌이었기에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다.일본은 조선을 병합했고 만주에 괴뢰국을 세웠으며 한때 중국 대부분을 점령했다. 만약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1895년의 ‘삼국간섭’이 증명하듯이 아시아는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같은 유럽 열강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운명이었다. 그것이 유럽과 아시아의 엄연한 격차였고 당시 중국과 조선의 어느 정치 지도자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정작 국가를 지켜줄 군사도 재정도 동맹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강과 독립 의지로 충만한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국력은 한 나라 스톡(stock)·플로우(flow)의 융합적 역량이다. 스톡은 인구와 국토 면적, 군사력의 크기가 결정한다. 플로우는 자본과 기술, 주변국과의 관계가 핵심 요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이 지났지만 한·중·일 3국은

    2025.08.13 17:25
  • [조일훈 칼럼] 미·중 최후의 결전, '라스트 벨'이 울리고 있다

    자유진영의 맹주 미국, 원래는 트럼프처럼 돈을 세는 나라가 아니었다. 재정과 무역 모두 큰 폭의 적자를 내면서도 기꺼이 세계경찰 역할을 자임하고 세상의 모든 물건을 사줬다. 구소련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미국 지도자들이 보여준 리더십과 책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덫을 놓은 원유 공급망 전쟁에 말려든 것이 결정적이었다.1970년대 중·후반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오르자 갑자기 재정이 넉넉해진 소련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소강상태의 미소 냉전을 열전으로 바꿔놓았다. 1982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전광석화처럼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동맹국들에 소련의 천연가스 매입을 금지한 뒤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적 지원을 매개로 원유 증산을 관철시킨 것. 1980년 배럴당 38달러이던 유가가 1987년 11달러로 폭락하자 소련 외환보유액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가 터졌다. 국제 시장에 돈을 빌리러 나온 소련의 자금줄을 막아버린 것. 소련은 1992년 공식 해체돼 지도에서 사라졌다.중국은 21세기 초까지 미국과 경제적 협력관계였다. 미국은 중국의 값싼 제품을 사주고 중국은 미국 정부의 국채를 사들였다. 중국 경제는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하고 미국은 닷컴경제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1990년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7%에 불과하던 중국 GDP가 2007년 30%까지 육박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이 불공정 무역과 기술 탈취를 일삼으면서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를 망치고 있다는 비판도 퍼져나갔다. 그러다가 2007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국의 어처구니없는 금융시스템 민낯이 드러나면서 달러

    2025.07.30 18:15
  • [조일훈 칼럼] 강남 집값 잡기

    서울 강남은 욕망의 정점이다. 강남 입성은 성공의 증거이자 한국 최고의 명품 회원권 확보를 의미한다.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공원 백화점 병원 맛집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지방 부호, 해외 자산가, 심지어 중국인까지 몰려든다. 누구나 돈을 벌면 먼저 강남에 집을 사고 싶어 한다. 강남 집값 급등은 지방 소멸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회적 위화감은 이미 위험 수위다. 남의 지갑이나 계좌는 열어볼 수 없지만 남의 집은 언제든지 쳐다볼 수 있고 가격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다. 저축(투자)과 소비로 가야 할 돈이 아무런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고정자산에 묶여버리는 폐해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오죽하면 한국은행 총재가 젊은이들 걱정에 금리를 못 내리겠다고 하겠나.많은 사람이 궁금해한다. 정부의 초강력 대출 규제로 강남 집값이 잡히겠느냐고. 시장은 고개를 젓는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대규모 공급 대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노무현, 문재인 정부도 그랬지만 전통적으로 민주당 정부는 공급 확대에 미온적이다. 강남에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 서울, 나아가 수도권 집중도를 더욱 부추길 뿐만 아니라 투기 바람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하지만 대출 규제 같은 수요 억제책에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규제가 풀리길 기다리는 수요가 계속 쌓인다는 것이다. 혹여 가격이 떨어지면 더 폭발적으로 쌓인다. 예를 들어 강남 30억원짜리 집이 25억원으로 떨어지면 대기 수요가 다섯 배, 열 배로 늘어나는 식이다. 이런 구조에선 규제의 완급 사이에서 일어나는 계단식 가격 상승을 막을 수 없다. 또한 집값 억제를 이유로 시민의 경제적 자유와

    2025.07.16 17:16
  • [조일훈 칼럼] 누가 뭐래도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가 먹사니즘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는 한국의 3대 주력산업이다. 수출, 투자, 일자리를 견인하는 국부의 원천이자 인공지능(AI)과의 융·복합화가 파상적으로 일어나는 산업이다.배터리는 자율주행차·전기자동차 성장궤도를 추종한다. 전력을 필요로 하는 이 세상 모든 모바일과 동행한다. AI 로봇과 도심항공모빌리티(UAM)도, 미래 선박과 항공기도 배터리로 움직인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미래 청사진으로 자동차 50%, UAM 30%, 로보틱스 20%를 제시한 이유가 있다. 자동차라는 칸막이를 넘어 AI, 자율주행, 로봇, 배터리 등 인류 문명의 첨단 역량을 모두 결집하겠다는 것이다.자율주행은 또한 엄청난 규모의 반도체를 요구한다. AI 칩과 시스템반도체 외에 고용량 D램과 낸드플래시도 필요하다. 실시간으로 도로를 주행하는 과정에서 도시 또는 국가 단위의 정보통신망과 연결하고 수많은 데이터와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 한 대에 들어가는 메모리 용량만 스마트폰의 20배에 달한다. 앞으로 AI와 배터리로 움직이는 모든 모빌리티가 첨단 반도체를 장착하게 될 것이다.3대 산업은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며 새로운 가치사슬을 만들어낸다. AI와 메타버스는 제조혁신에 가담할 뿐이다.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둘도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한국은 산업·군사 강국임에도 강대국들 틈바구니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아직은 작은 파도에도 크게 흔들리는 조각배 신세다.이런 나라의 주력 산업에 균열이 생기면 국가 전체의 경제·안보 전략이 흔들린다. 현대자동차가 팬데믹 시절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인 것은 삼성과 SK 덕에 전 세계적 반도체 품귀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2025.06.25 17:44
  • [조일훈 칼럼] 중국이라는 거대 장벽 앞에 선 '이재명 시대'

    지난달 말 한국공학한림원 소속 몇몇 공학자와 기업인들 저녁 모임에 나갔다. 당시 분위기로는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선거 얘기는 없었다. 대화 주제는 대부분 중국 제조업의 급성장과 우리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참석자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중국 산업의 자강은 현재 진형형이 아니라 과거 완료형으로 봐야 한다. 앞으로 중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올리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세탁기 하나 현지에서 제대로 팔 수가 없다. 중국 가전업체들은 소비자 가정뿐만 아니라 동네 세탁소까지 모두 IoT(사물인터넷)로 연결해 놨다.”부동의 세계 1위 삼성전자의 D램조차 2~3년이면 따라잡힐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같은 기업들이 저가형 시장에 이미 진입한 마당이다. 이제 한국 기업들은 고사양 제품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자 한 참석자가 단호하게 막아섰다.“세계 반도체 시장은 강자가 약자들의 싹을 잔인하게 밟아온 역사다. 저가형 시장을 내주고 나면 바로 다음 시장을 내놓으라고 할 거다. 엔비디아 일감을 따고 TSMC를 추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전선에서 밀려나면 답이 없다.”하지만 중국 반도체 회사들이 과거 일본 도시바나 독일 키몬다처럼 중간에 떨어져 나갈 것 같지도 않다. 중국은 첨단산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특정 기업이 망하면 또 다른 기업에 자산과 기술을 넘기는 방식으로 오히려 덩치를 키운다. 중국 전기차 굴기의 주역 BYD나 CATL도 그렇게 만들어졌다.“우리나라는 연구개발(R&D) 투자에 세금 혜택을 주지만 중국은 아예 현금을 지급한다. 반도체, 배터리,

    2025.06.04 18:07
  • 대선후보 경제 토론…'투자 활성화'는 쏙 빠졌다

    지난 18일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등 주요 대선 후보의 첫 토론. 주제가 경제 분야였지만 기업 투자 활성화와 관련한 공약과 토론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내수 부진을 타개하는 방안도 소상공인의 어려움과 소비 감소를 해결하기 위한 재정지출 논의만 주로 이뤄졌다.내수의 양 날개는 소비와 투자인데 희한하게도 투자는 쏙 빼놨다. 대선 주자들의 경제 지력 부족 탓인지, 토론 시간 부족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 1분기 마이너스 성장(-0.2%) 요인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는 문제다. 민간 소비와 정부 소비는 각각 0.1% 줄었는데 건설투자는 3.2%, 설비투자는 2.1%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올해 전망치를 포함해 최근 3년간 경제성장률이 2.0% 이하로 떨어진 것도 투자 지표(총고정자본형성 기준)의 가파른 하락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투자는 2022년 -0.2%를 기록한 이후 이듬해 1.4%로 올라서더니 지난해 다시 -0.8%로 내려앉았다. 건설투자 침체가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율도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오르내리며 2%를 넘어선 적이 없다.반면 소비 증가율(민간+정부)은 4.2%로 단기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순수출은 “내수 부진을 수출로 타개하고 있다”는 진단처럼 최근 5년간 지속적인 호조세를 보였다. 경제성장률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이 ‘내수+순수출’로 산정된다는 점에 비춰볼 때 내수 중에서도 투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올해 0%대로 예고된 저성장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n

    2025.05.19 18:04
  • 더 나은 삶을 위한 '좋은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잘산다는 것은 어제보다 오늘의 경제적 삶이 나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총소득(GNI)이라는 지표로 그것을 확인한다. 경제적 교과서는 GDP를 ‘경제주체별 부가가치의 합계’라는 생산 개념으로 주로 설명한다.하지만 소득으로 성장률을 계산하는 법도 있다.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소득 접근법에 따른 GDP 산출 도식은 ‘임금(근로자 및 가계 수입)+임대료(부동산 보유자의 임대수입)+이자수입(금융회사의 자본대여수입)+이윤(기업의 영업잉여)+세금(정부의 수입)’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 임금, 기업이윤, 세금이다. 다시 말해 경제주체별로 ‘가계소득+기업소득+정부소득’이 국민소득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맞다.한 나라의 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없듯이 소득을 인위적으로 늘릴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정부소득을 올리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면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이 자동으로 감소해 재정 증가 효과를 바로 상쇄해 버린다. 나아가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의 생산능력까지 떨어뜨린다.경제주체별로 보면 규모가 가장 큰 임금소득 총량을 올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재인 정부의 중심 정책인 ‘소득주도 성장’의 출발점도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을 인위적으로 올리는 정책은 그 자체로 반시장적이어서 어느 나라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 문재인 정부 때의 최저임금 과속에서 경험했듯이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급격한 임금 인상은 기업 투자와 고용 여력을 저해해 오히려 일자리와 취업자를 구축하는 부작용을 야기한다.임금의 절대적 함수

    2025.05.19 17:38
  • [조일훈 칼럼] 대선 판의 벌거벗은 임금님들

    우리 정치는 안데르센의 ‘벌거숭이 임금님’의 풍자를 떠올리게 하는 소극들로 가득하다. 정직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정치인들의 민낯이 국민들 앞에 무방비로 발가벗겨진 동화 속 황제와 오버랩된다.온갖 곡절 끝에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확정된 김문수부터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단일화 약속을 무참하게 외면하면서 청렴하고 반듯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구겨졌다. 평생 관료로 살면서 온화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졸지에 새벽 3시20분 후보 탈취 쿠데타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람을 업고 의원과 당원들 사이를 종횡무진한 권영세-권성동은 기본 판단력은 그만두고서라도 누구 말대로 알량한 정치력 밑천을 바닥까지 드러냈다.당원들까지 손가락질을 하는 마당에 지지율 타격이 없을 리 없다. 이제 대선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보수진영은 궤멸적 위기를 맞았다는 한숨과 탄식이 자욱하다. 보수의 유일한 희망은 ‘반(反)이재명’ 결집이다. 하지만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절대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선거는 이제 식상해졌다. 더욱이 이 구호는 3년 전 대선에서 한 번 써먹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은 어느새 내성이 생긴 듯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알고 있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이들이 많다. 시시각각 조여 오던 온갖 사법 리스크를 방탄 입법과 사법부 공격으로 되치기하는 데 성공한, 그야말로 반전의 생존 서사를 응원하는 기류까지 생겨났다. 급기야 정규재 조갑제 씨 같은 보수 논객들을

    2025.05.14 17:36
  • [조일훈 칼럼] 대선공약 'AI 3대 강국론'에 대하여

    유력 대선주자들의 ‘인공지능(AI) 3대 강국론’에 빠지지 않는 방책이 있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다. 5만 개, 10만 개 단위의 구체적 물량까지 제시하고 있다. GPU는 AI에 각종 데이터와 자료를 학습시키는 데 없어선 안 될 장치다. 고성능 칩셋은 장당 5000만원을 넘는 고가여서 10만 개를 사려면 5조원 이상이 필요하다.하지만 빅테크들의 입도선매로 올해 계약분은 사실상 마감된 상태다. 오픈AI 대주주 마이크로소프트는 15만 개를 확보해 놓고도 추가 주문을 서두르고 있다. 우리가 뒤늦게 돈 보따리를 싸 들고 가도 5만 개 같은 규모는 애초에 불가다. 일본 정부가 지난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앞세워 엔비디아 본사를 여섯 차례나 방문한 끝에 계약한 물량이 10만 개 남짓이라고 한다. 현재 국내에 반입된 물량 2000여 개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우리나라가 넌덜머리 나는 정쟁을 벌이며 지리멸렬하는 동안 바깥세상은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였다.한편으로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과의 AI 격차는 엄청나다. 민간 단위의 투자 규모만 보더라도 100 대 1이 넘는다. 미국 공학도들이 1960년대 규칙 기반 AI에서 시작해 오늘날 수많은 정형·비정형 데이터를 학습하는 생성형 AI로 발전시키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불러들일 과거가 없으니 현재는 그저 미몽과 혼돈일 뿐이다. AI 기술은 모방과 추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전복적이었기에 제조업 중심의 한국 산업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GPU도 처음부터 AI용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런 비디오게임용 반도체였다. 창업자 젠슨 황 역시 주목도가 낮았다. 2011년 방

    2025.04.29 17:22
  • [조일훈 칼럼] 한국, 다시 가난해질 각오 돼 있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많은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 힘은 가슴 먹먹한 해피엔딩의 서사였다. 개발경제 시대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낸 앞선 세대의 희생과 헌신이 후대의 눈부신 성장과 번영으로 이어진 여정은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었다. 우리들 삶이 지금 날까지도 궁상맞은 모습이라면 드라마는 완전한 허구나 공상의 세계에 머무르는 허탈함만 자아냈을 것이다.드라마 속 해피엔딩은 있어도 현실에선 ‘엔딩’이라는 것이 없다. 개인의 삶이든, 국가적 명운이든 크고 작은 도전과 시련을 피할 수 없다. 거침없던 우리 경제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적이 딱 한 번 있다. 1997년 11월 발발한 외환위기(IMF 사태)다. 노동·금융·공공개혁을 미룬 채 달러당 800원 시대를 흥청망청하느라 나라 곳간이 완전히 바닥난 초유의 사태였다. 위기 직전까지 99.99%의 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금리가 연 30%, 원·달러 환율이 2000원까지 치솟은 가운데 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엄청난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최대 기업조차 감원 대상을 정하기 위해 이른바 ‘사다리 타기’를 하는 참담한 장면이 이어졌다. 해외 언론들은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한국인들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것 같다”고 조롱했다.전례 없는 저성장 속에 트럼프발 관세 태풍까지 몰아닥치는 현 상황을 그 시절과 비교하면 어떨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는 아우성이 넘쳐난다. 엄살이 아닐 것이다. 외환위기는 우리 내부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자초한 것이지만 외부 환경은 우호적이었다. 미국시

    2025.04.15 18:02
  • [조일훈 칼럼] 무한 투자의 시대, 한국 자본시장은 준비돼 있나

    기업 생로병사에서 사모펀드는 일종의 막장이다. 기업 생존과 유지에 목숨을 건 무한책임 사원이 없기 때문이다. 법정관리로 파탄 난 홈플러스의 대주주 MBK는 끝내 증자를 하지 않았다. 홈플러스의 법적 주인이었으되, 주인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모펀드의 최우선적 목표는 투자금의 안전한 회수다. 남의 돈을 굴리는 펀드 성격상 유한책임 사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일반적 기업 대주주는 무한 책임을 진다. 자금난이 닥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본을 보강하고 부채를 일으킨다. 유상증자는 최후의 카드는 아니지만, 가장 경제적인 자본 조달 수단이다. 은행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은 한도가 있다. 반면 증자는 추가 신용보강으로 차입 여력까지 늘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증자 결행의 궁극적 부담은 대주주가 진다. 스스로 가장 큰돈을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소수·소액주주들이 남긴 실권주 대책도 세워야 한다. 재무 사정이 나빠졌는데도 대주주 증자 여력이 없는 기업은 막장으로 진입한다. 잘되면 사모펀드, 잘못되면 법원으로 직행하는 운명이다.무한투자의 시대다. 인공지능(AI) 로봇 반도체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의 신산업은 100조, 200조원의 천문학적 투자를 동반한다. 소프트뱅크 같은 기업들이 한 번 움직이면 수십조, 수백조원짜리 투자 발표가 쏟아진다. 한국 자본시장은 기로에 섰다. 미래 신산업을 위한 인프라 건설은 기존 제조업보다 ‘0’이 한두 개 더 붙는 돈을 필요로 한다. 빅테크들이 100조원 투자할 때 우리도 최소 10조원은 따라붙어야 한다. 배터리회사 SK온은 지난 2~3년 사이 모회사(이노베이션) 유상증자와 사모펀드 출자, 알짜 계열사 합병 등을 통

    2025.04.02 17:48
  • [조일훈 칼럼] 탄핵 전쟁보다 무서운 남미식 내전

    한국은 오래전부터 압축 고도성장의 대명사였다. 지금은 압축 추락의 나라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 경제성장률이 가장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성장률이 마지막으로 5%대를 찍은 때는 2007년(5.8%), 3%대 마지막은 2017년(3.2%)이었다(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 직후의 기저효과 성장률은 제외). 그리고 이듬해부터 곧장 2%대, 1%대로 진입했다. 불과 10여 년 만에 카지노 룰렛 게임의 구슬처럼 미끄러져 내렸다. 같은 기준으로 일본은 5%대 마지막 해가 1989년(5.4%)이었다. 5%대에서 1%대까지 30년 넘게 걸린, 아주 느린 속도였다.성장률 0%대 진입은 이제 시간문제다. 2022년 1.4%에 이어 올해 또다시 1%대 성장률이 예고된 현실이다.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수출경쟁력 약화, 좀비기업 속출, 자영업 도산, 가계부채 증가 등이 기업 투자와 소비를 모두 갉아먹고 있다. 도시 곳곳에 빈 점포 행렬이 이어지면서 해가 지기 무섭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구직을 포기한 ‘그냥 쉬었음’ 청년이 벌써 50만 명이다. 저출생 고착화로 얼마 되지도 않는 청년 숫자일 텐데 이 지경이다.“경제성장률은 이대로 가면 곧 0%대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한국인 누군가의 소득 증가는 누군가의 소득 감소로만 가능하게 된다.” 얼마 전 조윤제 연세대 특임교수가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제로 성장의 제로섬 게임적 성격을 짚은 탁견이다. 제로 성장은 경제 성장의 모든 플러스적 요소가 마이너스 요인에 의해 완벽하게 삭감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성장의 파이를 따먹는 동안, 누군가는 퇴락의 쓴맛을 본다.제로 성장의 비극은 계층 간 격차를 더욱 벌린다는 데 있다. 금리와 물가 상승처럼 극심한 경기침체는 중산

    2025.03.19 17:31
  • [조일훈 칼럼] 법관 초심 회복이 헌재 살리고 국민 승복도 이끈다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둘러싼 격렬한 논란을 보면서 두 개의 근본적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모든 사람이 그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할 것으로 예단하느냐가 첫 번째다. 아무리 야당 추천, 좌 성향 후보자라고 해도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본령이다. 개인적 성향과 별개로 법률적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법관과 사법부 독립의 핵심 덕목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국정협의를 걷어찰 정도로 마 후보자 임명에 결사적이고 국민의힘은 그의 편향적 이력을 들어 극력 저지에 나서고 있다. 이쯤 되면 웬만한 강심장의 소유자라도 자진 사퇴할 법한데 당사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두 번째 질문은 왜 하필이면 이렇게 논쟁적 인물이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돼야 하느냐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국회·대법원장에게 각각 3명씩 임명(선출)권을 부여하고 있다.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대통령이나 각 정당은 임명 과정에 어느 정도의 정파성을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마 후보자 같은 문제적 인물을 추천한 사례는 거의 없다. 좌파 성향의 법관들 중에도 법조계 내 학식과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 적지 않다. 법률과 판례도 시대 변화에 따라 바뀌는 만큼 진보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 잘못도 아니다. 그동안 야당이 진영 내 후보자를 임명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자질과 평판이 검증된 사람들이 대상이었다.헌재 구성이 논란을 빚게 된 계기는 사생결단식 정치대결과 잦은 대통령 탄핵으로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급물살을 타면서다. 정치가 내 편, 네 편을 확실하게 가르고 나오자 헌재 후보자들의 풀(pool)은 진영별로 급속히 좁아졌다. 이 틈

    2025.03.05 17:48
  • [조일훈 칼럼] 주 52시간제라는 역린(逆鱗)

    주 52시간제 문제는 긴 산업의 흐름에서 별것 아닐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말대로 52시간제 때문에 삼성 반도체가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천하의 인텔까지 흔들릴 정도의 산업 격변기다. 반도체, 그것도 연구개발(R&D)이라는 업종에 한해 예외를 두자고 하는데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이런 문제로 소모적 정쟁을 벌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반대론자들은 산업계를 또다시 장기 노동으로 밀어 넣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짓 선동이다.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규제를 배제한다고 밤샘 근무가 일상화될 리 없다. 요즘 세상에 그런 지시를 강제할 기업도, 순순히 따를 직원들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중에 누군가는 60시간 넘게 일해야 빠듯하게 가정을 꾸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런 일자리마저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른다.같은 시간을 일해도 보상은 천차만별이다. 서울과 뉴욕의 엔지니어 소득은 같을 수가 없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철 지난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사회적 분배 논리일 뿐, 가만히 살펴보면 동일노동이라는 것은 없다. 무엇보다 시장이 다르고 사람의 자질과 교육 수준도 제각각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주 30시간만 일해도 수억원대 연봉을 받는다. 그런 인재를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나라도 부지기수다. 한국도 그중 하나다. 주 52시간제는 시장의 이 모든 복잡성과 다양성을 거두절미하고 잘라버린다. 어떤 경우든 52시간을 넘기지 마라. 이것만이 지상명령이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폭력이 없다. 여기에 해고는 원천 불가다. 정년은 법제화돼 있다. 이런 경직성이

    2025.02.19 17:40
  • [조일훈 칼럼] 누가 청년의 敵인가

    광장은 분노와 심판의 열기가 들끓는 공간이다. 본래 청년들은 쟁취와 해방의 좌파 광장에 있었다. 지난 50년간 거리 민주화 운동의 전위부대였다. 그들에겐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명분과 열망이 있었다. 어느덧 세상이 바뀌어 2030 청년들의 우파 광장 진입이 시작됐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변화다. 극우라는 폄하는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이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우파 유튜버의 극성스런 세례를 받았다는 분석도 편향적이다. 정치 유튜브 열풍이 한두 해의 일도 아니고 그 수준이 갑자기 고양된 것도 아니다.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에 결집한 청년들은 기존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다. 학교와 직장과 집을 오가면서 차분한 일상을 영위하던 젊은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확인되는 수치를 보면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구속에 이르는 40여 일 사이에 줄잡아 백만 명 정도의 2030 청년이 보수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추정된다. 무소불위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했겠지만, 순전히 정치적 요인만은 아닐 것으로 본다.한국 청년들은 유사 이래 가장 스마트하다. 일개 유튜버가 속여넘길 정도의 지적 수준이 아니다. 디지털 문명에 최적화돼 있고, 혼자 힘으로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며, 해외 주식 투자를 통해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정통하다. 엔비디아와 테슬라와 TSMC와 삼성전자 주가를 종주하며 첨단산업의 동향과 미래 기술 지형 변화를 꿰뚫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우리 기업과 산업이 어떻게 해야 존속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여러 복합적 요인 속에서도 그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2025.02.06 17:47
  • [조일훈 칼럼] 한국 조선업의 대항해 시대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에 총길이 900㎞의 말라카해협이 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뱃길로 해상 석유 수송의 절반 이상이 이곳을 지난다. 언제든 자유항해가 보장되지만 실질적 제해권은 싱가포르에 태평양함대 기지를 둔 미국에 있다. 말라카해협은 모든 면에서 전략적 요충지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이 해협을 봉쇄하면 상대국 선박들은 시간과 거리비용이 큰 인도네시아 남단으로 우회해야 한다.2013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표방한 ‘일대일로(一帶一路)’ 중 ‘路’는 바로 이 해협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인도양과 아라비아해, 동쪽으로는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독자적 해상 통로를 건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 영향력을 견제해야 하는 중국 입장에선 말라카해협 좌우 바다의 해상 교두보 확보와 지배력 확대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장차 대만 접수를 위해서라도 ‘말라카 딜레마’는 큰 걸림돌이다. 중국은 그동안 주변 국가들에 대한 퍼주기와 무력충돌을 병행하는 강온 책략으로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인도양 연안 국가들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이 포진한 남중국해에도 인공섬과 해군기지를 잇따라 건설해왔다.그 당연한 수순으로 중국 해군력은 지난 10여 년간 양적 팽창을 거듭해왔다. 특히 근해 공략을 위한 초계함과 연안전투함을 압도적 격차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11척, 순양함 52척, 구축함 76척으로 먼바다를 경영하는 선단에선 중국(항공모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36척)을 크게 앞서고 있지만 남중국해 같은 바다에서 수적 우위를 앞세운 중국 해군의 기동력을 직접 상대하기가 어

    2025.01.15 17:41
  • [조일훈 칼럼] 2025, 대한민국 기업인을 향한 격문(檄文)

    기업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을사년 새해가 밝았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가파른 내리막길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는 탄식이 많이 들립니다. 전대미문의 내우외환으로 국운 쇠락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지난 한 해는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바라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다시 요원해졌습니다. 중대재해법과 주 52시간제 완화가 불발되고 인공지능(AI) 시대를 떠받칠 반도체·전력망 특별법도 끝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연금·교육·세제 분야의 구조개혁도 멈췄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거대 야당의 몽니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요령부득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직은 우리 정치와 국민 의식이 이 정도 수준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국은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트럼프·푸틴·김정은발 외풍은 더욱 거세질 듯합니다. 국가 전체가 대내외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한국 대통령이 트럼프를 가장 마지막으로 만날 것 같습니다. 이미 트럼프발 신국제질서가 굳어진 뒤겠죠.이제 믿을 언덕은 기업인밖에 없습니다. 기업 간 경쟁이 국가 간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험악한 시대에 여러분만 덜렁 글로벌 전장에 밀어 넣게 됐습니다. 미안하고 면목이 없습니다. 그동안 국민들은 기업인들의 노고를 자주 잊고 살았습니다. 지금 누리는 삶의 질을 당연하게 느끼면서도 정작 누구 덕분인지는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농공상의 인습 탓일까요. 규제기관의 위세와 발호는 여전히 거칠고 유난스럽습니다. 같은 정

    2025.01.01 17:21
  • [조일훈 칼럼] 윤석열 실패가 자유주의 패배는 아니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사회의 구성원리로 삼고 있다. 보수는 이것을 철석같이 지지한다. 사회주의보다 자유주의,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 결과적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 정부 개입보다 시장 자율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우파 이념은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응원하고 신봉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만드는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자유와 재산권을 허용하고 보장해준다.보수는 ‘지킨다’는 말 뜻 그대로 헌법적 가치에 충실하다. 그 길이 수월한 것은 아니다. 좌파의 토양은 광대하고 수법도 격렬하다. 좌우 이념의 대치 속에서 적잖은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중도로 빠진다. 하지만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표방하고 있는 한,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은 우파적이고 나머지는 대안적 이념일 뿐이다. 현실정치는 대체로 보수에 불리하게 작동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혜택의 넓고 고른 확산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정치적 소수로 몰아넣는 속성이 있다.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 노동자들 간 역학관계를 대입해보면 수긍이 간다.양측은 원천적으로 생각과 태도가 다르다. 기업인은 전체 구성원들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진다. 그들은 시장을 직접 상대한다. 고객의 표정과 선호가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낀다. 반면 근로자들은 매월 꼬박꼬박 들어오는 급여가 우선이다. 생계 테이블이 그날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회사가 인공지능(AI) 시대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느냐 같은 문제는 부차적이다. 괜히 근로자들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소득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과 정해진 날짜에 봉

    2024.12.18 17:41
  • [조일훈 칼럼] 윤 대통령의 계엄령 파동…대한민국 피크아웃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파동이 참담한 실착으로 끝났다. 지도력은 심각하게 훼손됐고 시민들의 불신은 깊어졌다. 정국은 대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경제·안보 분야의 영속적 전환기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자유주의 복원을 기치로 내건 윤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좌파적 토양을 걷어내는 데 많은 역량을 쏟아부었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 때도 ‘반국가세력 척결’을 첫손가락에 꼽았다.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입법폭주와 발목잡기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 주도면밀하지 못했고 판단 능력도 부족했다.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택한 것, 국무위원 상당수의 반대에도 결행한 것,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반법치·반헌법적 행태를 보인 것, 모두 문제적이다. 윤 대통령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그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윤 대통령의 착오와 무책임을 추궁하는 것과 별개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한국 사회는 경제 산업 문화 군사 분야의 눈부신 성취에도 늘 정체성의 혼돈을 겪어왔다. 정체성은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느냐에 대한 공감대다. 우리 국민이 어떤 나라를 꿈꾸고 있으며 어떤 사회를 이상적으로 여기느냐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의 좌우 대립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배양되고 착근된 것이다. 박정희 장기 독재와 가혹한 군부정권의 압제 속에서 배태된 반미·반일·반기업 캠페인은 역설적으로 경제 성장의 자양분을 받아먹으면서 마침내 우리 정치 지형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에 걸

    2024.12.04 17:42
  • [조일훈 칼럼] 현대차가 '기업 관료주의' 연못에 던진 돌 하나

    스페인 출신인 호세 무뇨스가 현대자동차 차기 최고경영자(CEO)로 발탁된 것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룹 싱크탱크 사령탑을 맡은 주한 미국대사 출신인 성 김 고문도 그렇다. 두 사람 모두 현대차와의 인연은 깊지 않다. 무뇨스 사장은 2019년, 김 고문은 지난해 합류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판매 실력 하나만 보고 무뇨스를 영입했다. 현대차에 입사하기 전까지 15년간 닛산 유럽법인과 북미법인에서 마케팅을 책임진 인물로 한때 세계 자동차업계의 거물로 군림한 카를로스 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현대차와 피를 철철 흘리며 싸운 적장이었던 것이다.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지난 5년간 현대차의 해외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은 가파르게 올랐다. 4대 그룹에 외국인 CEO는 외계인 같은 존재다. 쿠팡 창업자 김범석마저 한사코 ‘한국 CEO’ 지위를 거부하는 현실이다. 과잉투성이인 한국의 기업 관련 법과 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것이 많다. 경영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무뇨스로선 부담스러울 수 있다. 내부 소통도 문제다. CEO 주재 회의에 매번 통역을 둘 수도 없을 테니 현대차는 저절로 ‘영어 공용화’가 이뤄질 판이다.무뇨스 체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기업 조직과 문화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그에겐 현대차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누구의 측근으로 성장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 준 정 회장 외엔 마음의 빚이 없다. 내년부터 부회장으로 승진해 완성차 사업 전체를 총괄하게 된 장재훈 현대차 사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뜻밖에도 삼성 공채 출신이다. 삼성물산을 거쳐 닛산, 제너럴일렉트릭(GE), 노

    2024.11.18 17:52
  • [조일훈 칼럼] 대통령의 위기, 대통령의 무한 책임

    예고된 재앙은 태풍이나 토네이도를 닮았다. 미리 예측해도 발생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유일한 대응책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경로에 방파제를 쌓고 시설물을 점검하며 선제적 대피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국회가 아니라 정부의 몫이다. 우발적 재난이든, 예기치 못한 위기든, 국민은 모든 책임을 정부에 묻는다. 세금을 걷어 예산을 쓰고 수많은 공무원과 조직을 거느리는 만큼 극히 온당하다.국회는 태생적으로 지식과 전문성을 축적하지 않는다. 선거가 되풀이될 때마다 물갈이가 이뤄지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탓에 그럴 겨를도 없다. 혹여 의원 개인의 전문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리당략이 우선이다. 그래서 4성 장군 출신이 안보 문제에 엉뚱한 발언을 내놓거나 의사 출신이 의료개혁의 본말을 전도하는 경우를 왕왕 목격한다. 그들은 정책의 합리성이 아니라 정치적 생존과 확장을 먼저 따진다. 주된 관심은 표와 공천과 권력이다. 그래서 무려 5선 국회의원이 한낱 정치 브로커에게 온갖 핀잔과 수모를 당해도 묵묵히 참아낸다. 유감스럽게도, 정당은 대개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다.윤석열 대통령은 처음에 멋도 모르고 이런 세계로 밀려들어간 것 같다. 문재인 정권의 불의에 맞서 탄압을 자초한 윤 대통령의 정치 입문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로 야인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국민의힘 입당 여부와 시점, 모양새까지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결정해야 했다. 공당의 체계적 보좌를 받지 못했으므로 부족한 주변 인맥들을 계속 점 조직처럼 연결해갈 수밖에 없었다. 명태균도 그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다급한 와중에 옥석을 가릴 틈이 없었을 것 같다. 취임 직전 김건희

    2024.11.05 17:26
  • [조일훈 칼럼] 삼성의 위대한 유산

    삼성전자는 인텔처럼 파운드리 사업을 떼어낼 수 없다. 인텔은 주주들의 압력을 못 이기는 척 적자 사업 파운드리를 분사했다. 항복 문서를 쓰는 데 체면이나 명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삼성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본체에서 분리된 사업부가 1년에 2조원의 적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투자와 운영비는 누가 충당할 것이냐의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또 어느 구성원이 앞날이 먹장구름 같은 신설 회사로 선선히 걸어 들어가겠나. 강성 노조와 경영자 배임이라는 갈고리가 작동하는 한국적 현실에선 해결 불가다.삼성 반도체의 3각 축인 메모리 반도체, 시스템LSI, 파운드리는 죽으나 사나 한 덩어리로 있어야 할 운명이다. 더욱이 파운드리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향후 30년의 명운을 건 이 전장에서 패퇴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 그나마 건재한 메모리도 파운드리의 뒷받침이 없다면 경쟁력 약화가 불가피하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같은 첨단 반도체 주자들의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시장은 글로벌 빅테크가 반도체 칩을 설계하면 대만 TSMC가 거의 다 받아먹는 구조다. 삼성의 위기는 TSMC가 너무 막강하다는 데 있다. 반도체 제조 능력의 최종 잣대인 ‘설계 IP(intellectual property)’의 격차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IP는 반도체의 특정 기능을 구현하는 회로 블록을 뜻한다. 이 자산이 많고 다양할수록 고객이 원하는 칩 성능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다. 제조업에서 공구가 서너 개인 곳과 30~40개에 달하는 기업의 차이를 떠올려 보라. 삼성이 못나서가 아니다. 삼성이 주력인 메모리로 돈을 쓸어 담는 동안 TSMC는 파운드리에서 오랫동

    2024.10.23 17:39
  • [조일훈 칼럼]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굴리면 일어날 일들

    근로자 퇴직연금을 국민연금공단에 맡기자는 여야 정치권의 발상은 수익률 격차에서 비롯됐다. 국민연금의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5.7%. 같은 기간 퇴직연금은 2.1%에 불과하다. 가입자들의 돈이 대부분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는 탓이다. 이 돈을 국민연금으로 옮기기만 하면 2%짜리 수익률이 6%로 오른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계산법이다.그런 둔갑술은 가능하지 않다. 2%와 6% 사이에는 엄청난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다. 더 많이 벌고 싶으면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9.1%의 기록적 수익률을 올린 캐나다 연금(CPP)은 전체 자산의 80%를 주식과 대체자산으로 채웠다. 완전한 고위험 투자다. 개인으로 치면 일시불로 받은 퇴직금의 80%를 주식에 ‘몰빵’한 셈이다. 비록 CPP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지만 높은 수익률이 높은 손실률과 동행하는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열 번의 투자를 성공시켜도 단 한 번의 방향 착오로 원금을 잃는 것이 투자의 세계다.더욱이 국민연금의 현재 수익률이 앞으로도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 지난 10년간 큰 수익을 안겨준 미국 주식시장의 상승가도가 향후에도 지속될지 의문이다. 현행 운용 방식을 퇴직연금에 그대로 대입할 수도 없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은 가입자의 법적 권리, 연금 수령 방식, 장단기 운용 방식 모두 다르다. 국민연금 수령은 법정 연령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운용 성과와 관계없이 당초 정부가 약정한 금액이 보장된다. 투자금 회수 기간도 초장기다. 국채 30년짜리를 사서 만기 때까지 들고 갈 수도 있다. 퇴직연금은 연금 수령 시점과 인출 방식 모두 은퇴 근로자 개인이 결정한다. 뒷세대가 앞세대 연금을

    2024.10.09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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