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 1회 변재승(왼쪽부터), 2회 황상구, 4회 김태정, 6회 권광중, 8회 이규홍, 10회 황우여.
사시 1회 변재승(왼쪽부터), 2회 황상구, 4회 김태정, 6회 권광중, 8회 이규홍, 10회 황우여.
그들은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걸어왔다. 그들의 법조 인생은 ‘사상누각’ 같았던 한국 법조계의 주춧돌과 대들보가 됐다. 수사부터 소송 절차, 법률서비스산업과 공익 활동까지 그들의 손길과 발길이 속속들이 닿아 있다. 사법시험 초기인 1~10회 합격자, 그중에서도 검사나 판사로 활약한 사람들 이야기다.

◆판례 만들고, 특수 수사 기틀 닦고

사법시험은 1963년에 처음 시작됐다. 공무원 채용 절차의 일부였던 사법고시 고등과가 폐지되면서다. 사법부 독립과 전문 인력 양성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1회 합격자 수는 모두 41명이다. 처음 2년은 해마다 두 번씩 시험을 치렀다. 만성적인 인력난 해결이 목적이었다. 10회(1969년)까지 배출 인원은 총 312명이었다.

‘최악의 난도’로 유명한 시험은 7회다. 합격자가 5명에 불과했다. 사시는 10회까지는 절대평가 방식으로 60점 이상만 합격할 수 있었다. 절대평가제는 연간 배출되는 법조인 수가 들쑥날쑥하고 적정 인원을 뽑기도 어렵다는 이유로 1970년부터는 정원제로 바뀌었다.

1회 출신인 변재승 서성 이임수 전 대법관은 수많은 판례를 만들어내며 법 체계의 기틀을 닦았다. 변 전 대법관은 한국 민사소송법 분야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사법 행정분야에서도 법원행정처 법정국장,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거치면서 ‘사법 행정의 전설’로 기록됐다. 인권 수사의 갈림길로 꼽히는 영장실질심사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영장심사 정착시킨 변재승…한국형 도산법 틀 잡은 이규홍
서 전 대법관은 사법부 독립을 강조하며 노무현 정부 초기 사법개혁을 내세운 법원 내 ‘진보 바람’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2003년 퇴임사에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법부는 ‘동네북’이 된다”면서 “여기저기서 사법개혁을 외쳐대는 데에는 사법부의 책임도 크지만 목소리 큰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 전 대법관은 근황을 묻는 한국경제신문 기자에게 “요즘 사법부 상황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없다”면서 복잡한 심경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2회 합격자 중에서는 고(故) 황상구 전 대구고검장(검사장)이 검찰 안에서 ‘전설적 존재’다. 그는 검찰 최초의 ‘특수통’이다. 당시로는 친인권 수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3년 대검 특별수사부가 창설된 뒤 가장 선임급으로 제4과장을 지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특수부 도입을 추진하면서 일본 도쿄지방검찰청 특수부를 벤치마킹한 부서다. 이를 기점으로 고위 공무원 부패 수사가 검찰 수사 영역으로 들어왔다.

◆한국형 도산법·중재분야 개척

8회 출신인 이규홍 전 대법관(현 광장 변호사)은 한국형 도산법의 기틀을 닦았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서울지법 민사수석부장을 맡아 기아와 한보 등 정리 상태에 놓인 수백 개 기업을 다뤘다. 당시 법원이 축적한 기업 구조조정 노하우는 한국이 도산법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오를 수 있는 뼈대가 됐다. 7회 출신인 고 노경래 전 부장판사는 국내 중재분야의 개척자다.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활약했던 그는 법무법인 화우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사시 9회에는 국내 법률산업에 기여한 법관 출신이 많다. 박재윤 전 대법관과 손지열 전 대법관은 2006년 같은 날 퇴임해 각각 바른과 김앤장에 합류했다. 이 둘은 각 로펌에서 송무분야 발전에 기여하며 2000년대 대형 법무법인(로펌) 발전기를 이끌었다. 10회에는 태평양 고문으로 활동 중인 고현철 전 대법관과 부장판사 출신으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있다.

가장 많은 논란을 낳으며 격변의 시대를 보낸 검사도 있다.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이다. 그는 김영삼 정부 최초의 호남 출신 검찰총장을 지낸 뒤 김대중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법무부 장관 임명 15일 만에 ‘조폐공사 파업 유도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전임 총장으로서 책임 문제에 걸려 낙마했다. 이후 ‘부인 옷로비 의혹’으로 특검 수사까지 받았으나 끝내 무죄를 받았다.

◆공익 활동에도 선구자

법조인으로서 공익 실천에 앞장서며 후배 법조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인물들도 있다. 5회에는 공익 활동의 길을 연 배기원 전 대법관이 유명하다. 그는 공익 활동과 변호사 생활을 같이하다가 대법관에 임명됐다. 퇴임 뒤에도 구청 무료 법률 상담과 후학 양성에 나서 후배 법관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

6회 출신인 권광중 전 사법연수원장은 법원행정처 송무국장 당시 한국 송무제도 개선에 기여한 인물이다. 퇴임 뒤에는 법무법인 광장에서 공익 활동에 앞장서며 대형 로펌 공익 활동의 토대를 닦았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