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논점과 관점] 더 중요해지는 '자주국방·안보'
북한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선의(善意)’로 포장된 유화책을 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때도 그랬다. 1993년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지자 미국에선 핵 시설 타격 등 강경책이 거론됐다. 비상이 걸린 북한은 ‘비핵화를 향한 장군님(김정일)의 선의’를 내세우며 협상에 나섰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김정일이 북한 협상 대표 강석주에게 내린 지침은 ‘시간을 벌어라’였다”고 썼다. 시간을 번 북한이 몰래 핵 개발을 지속한 것은 알려진 대로다. 이후 북한은 각종 ‘성명’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전략으로 핵을 더 고도화시켰다.

작년 말까지 도발을 일삼던 김정은이 올 들어 갑자기 대화 공세로 나왔을 때도 북한은 ‘평화’를 위한 김정은의 ‘선의’를 부각시켰다.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며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 이번엔 다를까 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와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들이 많다.

미국, 핵 검증 약속 문서화해야

한국·미국 정상과 대화에 나선 김정은은 올 들어 중국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비핵화보다 ‘제재 이완’에 더 초점을 맞춘 행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이 대북 제재 ‘뒷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소식이 잇따르는 걸 보면 김정은의 방중 목적을 짐작하게 한다. 북한이 핵을 숨기고 있고, 우라늄 생산 시설을 늘렸으며, 미국과의 정상회담 무렵에도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미사일 공장을 건설했다는 보도들은 ‘김정은 리스크’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미국의 태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선언했고,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꺼냈다. 핵 시설 은폐설에도 “김정은을 믿는다”고 했다. ‘트럼프 리스크’가 거론되는 배경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한 비핵화 시간표는 따로 없다”고 한 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년 내 해체”라고 다른 말을 해 혼선을 가중시켰다.

그래서 5일 세 번째로 북한을 방문하는 폼페이오 장관의 임무가 중요하다. 이런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김정은으로부터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로드맵뿐만 아니라 핵 폐기 검증과 사찰에 관한 약속도 받아 내야 한다. 그 방법은 북한이 뒤에 딴말을 할 수 없게 문서 형식이 돼야 할 것이다. 북한이 약속을 안 지킨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담보’가 필요하다.

비핵화 진전 없이 무장해제 곤란

남북한, 미·북 정상이 마주 앉아 비핵화를 약속했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응은 우려스럽다. 북한 비핵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한국엔 벌써 평화가 찾아온 듯하다. 한국군 자체 훈련도 줄줄이 연기했고, 미사일 방어사업도 중단했으며, 최전방 부대 시설 공사는 멈췄다.

미·북 협상이 성공하든 그렇지 않든 가장 큰 부담을 져야 하는 쪽은 한국이다. 협상이 잘되면 주한미군 철수론이 탄력받을 것이고, 협상이 깨지면 북한 핵·미사일을 이고 살아야 한다. 어떤 경우든 자주국방, 안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도 비용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은 트럼프 리스크와 김정은 리스크를 동시에 헤쳐 나아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혹여라도 김정은이 말하는 ‘선의’ ‘평화’가 우리 안보 무력화를 가져오는 ‘트로이의 목마’가 돼선 안 된다. 북한 비핵화 첫발도 떼기 전에 우리 내면부터 스스로 무장해제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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