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율이 높은 아파트를 겨냥해 전세를 끼고 집을 매입하는 ‘갭(gap)투자’가 전세시장을 안정시킨 것일까.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서울 전세시장이 안정세를 보이면서 ‘갭투자의 역설’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올해 입주 물량이 크게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갭투자자들이 내놓은 전세 아파트도 물량 공급 확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다.
내년 1월까지 입주민 이주가 진행되는 둔촌동 둔촌주공1단지.  전형진 기자
내년 1월까지 입주민 이주가 진행되는 둔촌동 둔촌주공1단지. 전형진 기자
다만 전반적인 전세시장 안정세에도 서울 강남권은 국지적 상승세가 예상된다. 재건축 단지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인 데다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이사철 시작인데…전셋값 안정세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10월 둘째주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은 0.03% 상승했다. 지난 5월 말 0.12% 올라 연중 최고를 기록한 이후 상승폭이 꾸준히 줄어들었다. ‘8·2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부터는 0.01~0.04%로 안정된 주간상승률을 나타냈다. 연간 누적으로 보면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이달까지 1.78% 올랐다. 지난해 같은 기간(2.54%)에 비해 안정세가 뚜렷하다. 전세난을 겪었던 2015년(10.19%)과는 더욱 비교된다.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전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홀수해마다 가격이 출렁이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올해는 이사철에도 전세대란 신호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이 같은 공식이 깨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선 부동산 중개업소들은 최근 주택시장 활황기에 늘어난 갭투자를 전세가격 안정 요인으로 꼽고 있다.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구입한 갭투자자들은 전세 만기가 도래하더라도 입주하지 않고 다시 전세로 집을 내놓기 때문이다. ‘갭투자의 성지’로 불리던 상계동의 W공인 관계자는 “갭투자가 늘어나면서 공급 또한 늘어난 만큼 전셋값은 내려갈 수밖에 없다”며 “그동안 중소형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많이 오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입주가 시작된 영등포동의 한 신축 주상복합 아파트는 이달 말 잔금일을 앞두고 전세 매물이 쌓이는 중이다. 일대 중개업소들은 이 아파트 전체 1200여 가구 가운데 200여 가구에서 아직도 전세 세입자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단지 인근 S공인 관계자는 “추석 연휴가 길어 팔지 못한 전세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며 “잔금 여력이 없는 집주인들이 가격을 낮추면서 전용면적 84㎡ 전셋값이 5억원대 초중반까지 수천만원 내려갔다”고 말했다.

◆입주물량 감소·재건축 이주 ‘변수’

전셋값 안정이 광역적인 수치일 뿐 강남 등 전세 수요가 많은 지역에선 여전히 국지적인 가격 불안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도곡동 삼성아파트 전용 80㎡는 이달 6억2000만원에 전세계약이 체결돼 2개월 전보다 9000만원가량 값이 올랐다. 삼성동 풍림1차 전용 59㎡는 한 달 새 4500만원가량 오른 4억9000만원에 계약됐다. 신천동 장미2차 전용 141㎡와 성내동 대림e편한세상1차 전용 84㎡ 역시 각각 9000만원과 5000만원가량 올랐다.

서울에서 연말까지 입주 예정인 아파트 물량이 크게 줄어든 것도 전셋값 불안을 키울 전망이다. 올해 4분기 서울 입주 아파트는 총 5321가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나 줄어들었다. 이마저도 임대아파트를 제외하면 2409가구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대형 재건축 단지들의 이주도 줄을 잇는다. 개포주공4단지(2840가구)는 오는 12월 중순까지 입주민의 이주가 예정돼 있다. 조합원 수가 많은 둔촌주공(5930가구) 이주 행렬도 내년 1월까지 이어진다. 방배경남(450가구)과 개포주공1단지(5040가구) 역시 올해 중으로 이주를 시작할 전망이어서 이들 지역의 전세난이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서성권 부동산114 선임연구원은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은 매매에 비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본격적인 이사철로 접어들면서 강남 등 전세 수요가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국지적인 전셋값 상승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