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이 7개월여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세계 2위 낸드플래시 제조업체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사실상 성공했다. ‘한·미·일 연합’을 제치고 한때 웨스턴디지털을 중심으로 한 ‘신(新)미·일 연합’ 쪽으로 매각 대상자가 기우는 분위기가 연출되는 등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둘러싼 ‘판’이 수차례 요동쳤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깜깜이’ 승부였다.
도시바메모리 인수전…SK하이닉스 '묘수' 통했다
◆또다시 적중한 SK하이닉스의 ‘묘수’

엎치락뒤치락하던 협상 결과를 좌우한 것은 다양한 메모리반도체 고객들을 인수 컨소시엄 일원으로 끌어들인 SK하이닉스의 ‘묘수’였다. 특히 도시바메모리로부터 대규모 낸드플래시를 공급받는 애플을 끌어들인 것이 ‘승부수’가 됐다.

도시바메모리 인수전…SK하이닉스 '묘수' 통했다
애플은 30억달러(약 3조4000억원) 안팎의 투자금을 ‘한·미·일 연합’에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 인수자금 2조엔(약 20조2000억원)의 6% 수준이다. 애플은 향후 도시바메모리의 경영권을 인수할 의도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최근 수급 불균형 탓에 웃돈을 주고도 제품을 구하기 쉽지 않은 낸드플래시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분석이다. 도시바로서도 향후 반도체 경기와 관계없이 메모리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고객을 확보하게 된다.

애플 외에도 델, 시게이트, 킹스턴테크놀로지 등 미국의 정보기술(IT) 업체들이 같은 목적으로 ‘한·미·일 연합’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학기기 업체인 호야 등 일본 기업도 다수 들어왔다. SK하이닉스가 이 같은 아이디어를 컨소시엄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한·미·일 연합’ 일원 중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는 유일한 외부의 전략적 투자자(SI)다.

◆최대 2조4000억엔까지 베팅

웨스턴디지털 측과 팽팽한 시소게임을 벌이던 협상 막바지에 연구개발(R&D)과 시설투자 목적 등으로 도시바메모리에 추가 투자를 하겠다는 수정안을 제시한 것도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한·미·일 연합’은 주식 인수자금 2조엔 외에 4000억엔(약 4조500억원)을 투자자금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조건도 내건 것으로 전해졌다. 모기업인 도시바홀딩스가 미국 원자력발전사업 투자 부실 탓에 대규모 시설 투자에 부담을 지니고 있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도시바 경영진도 ‘한·미·일 연합’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했다. ‘한·미·일 연합’을 이끄는 주체는 외형적으로는 미국의 사모펀드(PEF)인 베인캐피털이다. 주식 의결권을 베인캐피털이 49.9%로 가져가기로 했다. 하지만 도시바홀딩스(40%)와 일본 기업 및 금융회사(10.1%)들이 합치면 의결권 과반을 확보할 수 있다. 일본 측으로선 경영권을 해외에 넘기지 않았다는 명분을 갖추게 됐다.

◆SK하이닉스 경영참여 가능할까

SK하이닉스는 앞으로 도시바메모리 기업공개(IPO) 과정 등에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할 전망이다. 지난해 기준 도시바메모리의 낸드플래시 세계 시장 점유율은 19.3%로 세계 2위다. SK하이닉스는 점유율 10.1%로 5위권이다. 두 회사 점유율을 합치면 세계 1위인 삼성전자(35.2%)를 턱밑까지 쫓아갈 수 있다. 두 회사는 핵심 미래 기술에 대한 공동 R&D와 같은 전략적 협력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 같은 포석을 염두에 두고 도시바 인수전을 직접 챙겼다.

‘한·미·일 연합’의 도시바메모리 인수가 안착하는 데까지는 난관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매각 상황이 도시바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SK하이닉스가 여러 가지 조건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향후 도시바메모리 주식을 매입할 권한을 확보했는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도시바와 낸드플래시 합작사업을 했던 웨스턴디지털이 매각절차 무효를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변수로 남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도시바와 ‘한·미·일 연합’ 내부 구성원 간 세부 조건을 놓고 협상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며 “세계 각국의 독과점 심사를 통과하는 것도 관건”이라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도쿄=김동욱 특파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