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기득권으로부터 초연한 유일한 집단
얼마 전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 “한국의 가장 큰 기득권 세력은 재벌”이며 “귀족 노조보다 먼저 재벌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직책과 위상으로 봐 새 정부의 경제에 관한 견해를 드러낸 발언으로 보인다.

기득권(vested interest)의 원뜻은 ‘법으로 보호되는 개인적 권익’이다. 이제 그 말은 ‘아직 법으로 보호되지만 새로운 사회 질서에선 정당화되기 어려운 권익’을 뜻한다. 이처럼 기득권이란 말의 뜻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정당한 권익도 세월이 지나면 정당성을 잃을 수 있으며, 모든 권익은 끊임없이 시민들의 검증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정치적 평등이 이뤄지지 못한 근대 이전의 사회들과 현대의 전체주의 사회들에선 기득권이 컸다. 자유주의 사회들에선 기득권이 훨씬 작다. 기득권이 시장보다 정부 부문에서 많이 나오므로, 시장 경제가 발전한 사회에선 기득권이 더욱 작다.

시장 경제에서 기득권은 주로 소득재분배 과정에서 나온다. 모든 집단이 자기 몫을 늘리려 애쓰고, 정치적 힘에 비례해 기득권을 얻는다. 그런 기득권은 제도, 정책 및 교부금 형태로 구현된다. 이들 가운데 바꾸기 어렵고 시민의 검증을 받지 않는 것은 제도의 형태를 한 기득권이다.

제도적 기득권 가운데 으뜸은 노동조합이다. 헌법 제33조에 따라 노조는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헌법이 이미 제21조에서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터에 특정 집단의 결사에 이처럼 큰 특권을 보장한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게다가 노동의 공급에서 독점적 지위를 부여한 제도이므로 노조는 시장 경제의 원리를 거스른다. 이처럼 부자연스럽고 원리를 거스르는 제도이니, 노조가 큰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헌법으로 보호되니 시민이 검증할 수도 없어 노조의 권한은 점점 커지고 정치적 영향력은 온 사회로 퍼진다. ‘귀족 노조’라는 말에 이런 현상이 잘 담겼다.

법으로 노동자의 권익이 충분히 보호되는 한국 사회에서 노조가 누리는 거대한 기득권은 시대착오적이다. 불행하게도 노조의 그런 기득권을 줄일 만한 세력은 없다. 어느 나라에서나 경제 개혁의 기본 처방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지만 그 처방을 제대로 실천한 나라는 없다. 노조가 법으로 보호된 사회마다 좌파 정당은 실질적으로 노조의 ‘정치 부서(political arm)’다.

정부의 소득재분배가 워낙 크고 널리 이뤄지므로 기득권은 전반적이다. 비록 노조처럼 큰 기득권을 효과적으로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거의 모든 시민이 직업, 나이, 성, 지역, 정치 성향에 따라 집단을 이뤄 자기 몫의 기득권을 얻으려 애쓴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작은 집단들로 나뉘고 그들의 작은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만 양산된다.

이런 기득권 경쟁에서 비교적 초연한 집단은 민간 기업이다. 재분배되는 소득을 창출하는 집단이니 기업들은 재분배 과정에서 일단 제외된다. 더 근본적 이유는 기업들이 시장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생산한 재화는 소비자 선택을 받아야 한다. 날마다 소비자 검증을 받는데 무슨 기득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민간 기업이 모두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늘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정책을 편다. 그런 정책으로 중소기업이 누리는 기득권은 무척 커서 선뜻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려는 중소기업이 드물 정도다.

이렇게 보면 기득권으로부터 초연한 유일한 집단은 대기업임이 드러난다. 바로 김 위원장이 재벌이라 부른 집단이다. 국내 시장이 워낙 작으므로 우리 대기업들은 모두 해외로 진출했고 우리 정부의 힘이 작으므로 어려움을 겪어도 스스로 해결했다. 오직 기업가정신과 성실한 노력으로 온 세계 소비자의 믿음과 사랑을 받아 범지구적 기업(global firm)들로 자라났다. 그 과정 어디에 기득권이 끼어들 틈이 있었겠나?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