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오씨' 시대는 가고 '트씨' 시대? (2)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8월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일이다. 반 총장은 54회 생일을 맞은 오바마에게 ‘上善若水(상선약수)’라고 쓴 친필 휘호를 선물했다. 생일 선물을 받고 싱글벙글 웃는 오바마 모습이 국내 언론에도 보도돼 화제가 됐다. 그런데 액자 한 귀퉁이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글자가 더 있었다. ‘奧巴馬(오파마) 總統(총통)’, 오바마 대통령을 가리키는 중국 표기다.

이대로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회장이 당시 페이스북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한글로 적고 우리 문자도 함께 소개할 좋은 기회였다는 게 요지였다. 상선약수야 우리말에도 있으니 그렇다 쳐도 이름과 직함을 굳이 한자로, 그것도 중국식으로 쓸 이유는 없었다. 이런 비판은 두 사람의 훈훈한 만남에 묻혀 논란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에서 외래 고유명사를 적는 방식은 독특하다. 뜻글자인 한자의 장점을 살려 옮긴다. 코카콜라는 커커우커러(可口可樂)이고, 우리 이마트는 이마이더(易買得)다. 입이 즐겁고, 쉽게 사서 얻을 수 있다니 절묘한 외래어 표기 방식이다.

우리도 뜻을 살려 말을 만드는 기법이 탁월하다. 지난 5월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국내 한 신문은 “‘오월동주’ 중국을 겨누다”란 제목을 뽑았다. 베트남전쟁의 앙금을 씻고 화해의 악수를 한 오바마와 월남(越南)을 오월동주 고사성어에 빗댔다. 월남은 베트남의 취음어다. 예전엔 우리도 외래 고유명사를 한자를 빌려다 적었다. 월남치마, 월맹, 월남뽕 등 합성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말의 진화 과정을 보면 오바마를 ‘오’씨, 월남을 ‘월’나라 식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벌써 ‘트’씨로 불린다. 우리 눈에 익숙해져 당연한 것처럼 쓰는 말 중에 섭씨와 화씨가 있다. 온도 단위인 이 말의 정체는 ‘섭이사(攝爾思)’와 ‘화륜해(華倫海)’다. 고안자인 스웨덴의 셀시우스와 독일의 파렌하이트를 중국에서 발음을 살려 한자로 적었다. 그 첫 글자 ‘섭’과 ‘화’를 성(姓)처럼 떼어내 각각 ‘씨(氏)’를 붙여 만든 게 섭씨와 화씨다.

이런 말에는 맛깔스러운 멋이 살아 있다. 마상(마음의 상처) 시강(시선 강탈) 애빼시(애교 빼면 시체)…. 인터넷 약어는 넘쳐나지만 대부분 단순하고 거칠다. 어떤 함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의미를 담고 형태도 아름다운 조어라야 생명력이 있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