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좋은 바텐더 청년, 단골 권유로 '트레이더' 입문…승승장구…잇단 M&A로 미국 선물옵션시장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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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런스 더피 시카고상업거래소 회장
세상 물정 모르던 시골뜨기
손님이름 줄줄 꿰던 바텐더, 거래소 구경 가서 눈이 '번쩍'
초보시절 살던 집 날릴 뻔
5만달러 빌려 15만달러 손실…타고난 협상력 점차 진가발휘
세계 최대 상품거래소로 키워
전자거래 도입·증시 상장…경쟁사 인수해 세계시장 장악
세상 물정 모르던 시골뜨기
손님이름 줄줄 꿰던 바텐더, 거래소 구경 가서 눈이 '번쩍'
초보시절 살던 집 날릴 뻔
5만달러 빌려 15만달러 손실…타고난 협상력 점차 진가발휘
세계 최대 상품거래소로 키워
전자거래 도입·증시 상장…경쟁사 인수해 세계시장 장악
마천루 사이로 불어오는 미시간 호수의 칼바람 때문에 ‘바람의 도시’라 불리는 미국 시카고는 세계 파생상품 시장의 중심지로도 통한다. 세계 최대 파생상품거래소를 운영하는 CME그룹 본사와 주요 자회사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선물 거래의 96% 이상을 장악한 CME그룹은 아시아와 유럽 등 세계로 무대를 넓혀 2012년부터 거래량 기준 파생상품 시장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시카고상업거래소’의 약자인 CME그룹은 버터와 계란을 거래하던 상인들이 1898년 세운 ‘시카고 버터 앤드 에그 보드’에서 출발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지만 성장세가 가팔라진 것은 최근 10여년의 일에 불과하다. 2006년 CME그룹 회장에 오른 테런스 더피에 의해서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CME그룹에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바텐더로 일하다 유명 트레이더 만나
더피 회장은 1958년 8월15일 시카고 남서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시카고의 구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세무서에서 일했다. 평범한 집안이었다. 어릴 때 꿈은 막연히 경찰관이나 소방관이었다. 그는 “그 외에 다른 직업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다만 특출난 점이 있다면 사교성이었다. 그는 서글서글한 태도로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됐다. 재치있게 말을 했고 상대의 장점을 찾아내 칭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만나는 일은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일처럼 즐거웠다”고 했다.
금융가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가 CME 트레이더가 된 계기도 이렇듯 쉽게 사람을 사귀는 사교성에 있었다. 1979년 그는 시카고 북서쪽에 있는 위스콘신대 화이트워터 캠퍼스에 입학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주점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레이크 제네바에 있는 고급 리조트에 있던 바였다.
CME와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일하던 트레이더들이 그곳을 즐겨 찾았다. 그중 한 명인 빈센트 슈라이버가 바텐더로 일하던 더피를 눈여겨봤다. 그가 주점을 찾는 모든 고객의 이름과 마시는 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을 보면서다. CME의 유명 트레이더였던 슈라이버는 더피보다 고작 10살 많았지만 이미 은퇴를 하고 나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한 돈을 번 상태였다. 그는 더피를 자신의 호화 맨션에 데려가고, 거래소에 데려가 구경도 시켜주면서 트레이더로 일해보라고 부추겼다.
그때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뜨기였던 더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슈라이버의 맨션엔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로널드 레이건을 비롯해 유력 인사들과 찍은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주문을 외치는 트레이더들의 고함소리로 시끌벅적한 거래소의 풍경도 그를 매료시켰다. “나도 이들처럼 되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더피 회장은 1980년 대학을 중퇴했다. 주당 58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CME에 ‘러너’로 들어갔다. 러너는 트레이더의 주문을 다른 트레이더에게 달려가 전달하고, 다시 돌아와 주문이 체결됐음을 알려주는 일을 한다. 전자거래가 도입되기 전 일이다.
21세이던 1981년엔 정식으로 CME 트레이더가 됐다. 이를 위해 가족이 살던 집을 담보로 5만달러까지 대출받았다. 몇 주 지나지 않아 15만달러의 손실을 봤다. 가족들이 집에서 쫓겨날 판국이었다. 더피 회장은 “아찔함에 구토가 나왔다”고 말했다. 멘토였던 슈라이버에게 도움을 청했다. 슈라이버는 직접 돈을 갚아주진 않았지만 그가 3년에 걸쳐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줬다.
○사교성과 정치력으로 사람들 마음 사로잡아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CME를 대표하는 곡물 트레이더로 성장했다. 타고난 붙임성과 협상력, 정치력이 빛을 발했다. 고객인 투자자는 물론 동료 트레이더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그 덕분에 1995년 CME 이사회에 들어가 임원이 됐고, 2002년엔 이사회 의장이 됐다. 2006년 CME그룹을 총괄하는 회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CME 회장이었던 레오 멜라메드 명예회장은 회고록에서 “더피는 트레이딩 현장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받았다”며 “차기 회장감으로 완벽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더피 회장은 곡물 트레이더로 일할 당시 전자거래를 선도적으로 도입해 개혁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사회 의장으로 있던 2002년엔 CME를 증시에 상장시켜 추진력도 인정받았다.
더피가 회장에 오른 2006년 이후 CME그룹은 급변했다. 2007년 경쟁 거래소인 CBOT를 120억달러에 인수해 합병했다. 1848년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로 설립된 CBOT는 세계 1위 파생상품거래소 자리를 놓고 CME와 경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각국 거래소의 합병을 통한 ‘몸집 키우기’ 경쟁에 CME와 CBOT도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더피 회장과 찰리 카레이 CBOT 회장은 둘 다 현장 트레이더였던 1983년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둘 다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에 시카고 토박이인 점 등 공통점도 많았기 때문에 합병이 수월히 진행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2008년 CME는 뉴욕상품거래소(NYMEX)까지 120억달러에 인수해 미국 선물옵션 시장에서 사실상 독점 구조를 구축했다.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률은 62.7%에 달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시카고상업거래소’의 약자인 CME그룹은 버터와 계란을 거래하던 상인들이 1898년 세운 ‘시카고 버터 앤드 에그 보드’에서 출발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지만 성장세가 가팔라진 것은 최근 10여년의 일에 불과하다. 2006년 CME그룹 회장에 오른 테런스 더피에 의해서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CME그룹에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바텐더로 일하다 유명 트레이더 만나
더피 회장은 1958년 8월15일 시카고 남서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시카고의 구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세무서에서 일했다. 평범한 집안이었다. 어릴 때 꿈은 막연히 경찰관이나 소방관이었다. 그는 “그 외에 다른 직업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다만 특출난 점이 있다면 사교성이었다. 그는 서글서글한 태도로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됐다. 재치있게 말을 했고 상대의 장점을 찾아내 칭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만나는 일은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일처럼 즐거웠다”고 했다.
금융가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가 CME 트레이더가 된 계기도 이렇듯 쉽게 사람을 사귀는 사교성에 있었다. 1979년 그는 시카고 북서쪽에 있는 위스콘신대 화이트워터 캠퍼스에 입학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주점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레이크 제네바에 있는 고급 리조트에 있던 바였다.
CME와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일하던 트레이더들이 그곳을 즐겨 찾았다. 그중 한 명인 빈센트 슈라이버가 바텐더로 일하던 더피를 눈여겨봤다. 그가 주점을 찾는 모든 고객의 이름과 마시는 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을 보면서다. CME의 유명 트레이더였던 슈라이버는 더피보다 고작 10살 많았지만 이미 은퇴를 하고 나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한 돈을 번 상태였다. 그는 더피를 자신의 호화 맨션에 데려가고, 거래소에 데려가 구경도 시켜주면서 트레이더로 일해보라고 부추겼다.
그때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뜨기였던 더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슈라이버의 맨션엔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로널드 레이건을 비롯해 유력 인사들과 찍은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주문을 외치는 트레이더들의 고함소리로 시끌벅적한 거래소의 풍경도 그를 매료시켰다. “나도 이들처럼 되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더피 회장은 1980년 대학을 중퇴했다. 주당 58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CME에 ‘러너’로 들어갔다. 러너는 트레이더의 주문을 다른 트레이더에게 달려가 전달하고, 다시 돌아와 주문이 체결됐음을 알려주는 일을 한다. 전자거래가 도입되기 전 일이다.
21세이던 1981년엔 정식으로 CME 트레이더가 됐다. 이를 위해 가족이 살던 집을 담보로 5만달러까지 대출받았다. 몇 주 지나지 않아 15만달러의 손실을 봤다. 가족들이 집에서 쫓겨날 판국이었다. 더피 회장은 “아찔함에 구토가 나왔다”고 말했다. 멘토였던 슈라이버에게 도움을 청했다. 슈라이버는 직접 돈을 갚아주진 않았지만 그가 3년에 걸쳐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줬다.
○사교성과 정치력으로 사람들 마음 사로잡아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CME를 대표하는 곡물 트레이더로 성장했다. 타고난 붙임성과 협상력, 정치력이 빛을 발했다. 고객인 투자자는 물론 동료 트레이더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그 덕분에 1995년 CME 이사회에 들어가 임원이 됐고, 2002년엔 이사회 의장이 됐다. 2006년 CME그룹을 총괄하는 회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CME 회장이었던 레오 멜라메드 명예회장은 회고록에서 “더피는 트레이딩 현장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받았다”며 “차기 회장감으로 완벽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더피 회장은 곡물 트레이더로 일할 당시 전자거래를 선도적으로 도입해 개혁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사회 의장으로 있던 2002년엔 CME를 증시에 상장시켜 추진력도 인정받았다.
더피가 회장에 오른 2006년 이후 CME그룹은 급변했다. 2007년 경쟁 거래소인 CBOT를 120억달러에 인수해 합병했다. 1848년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로 설립된 CBOT는 세계 1위 파생상품거래소 자리를 놓고 CME와 경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각국 거래소의 합병을 통한 ‘몸집 키우기’ 경쟁에 CME와 CBOT도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더피 회장과 찰리 카레이 CBOT 회장은 둘 다 현장 트레이더였던 1983년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둘 다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에 시카고 토박이인 점 등 공통점도 많았기 때문에 합병이 수월히 진행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2008년 CME는 뉴욕상품거래소(NYMEX)까지 120억달러에 인수해 미국 선물옵션 시장에서 사실상 독점 구조를 구축했다.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률은 62.7%에 달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