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경제 한파'에 등돌린 표심…남미 대륙에 '우파 바람' 분다
좌파 정부가 장악했던 남미에 ‘우향우(右向右)’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때 남미 12개국 중 10개국에서 집권했던 좌파 정당들이 국민 지지를 잃고 흔들리고 있다. 지난 23일 아르헨티나에서 12년 만에 우파 정당의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남미 좌파 블록이 무너지는 신호탄으로 보는 분석이 많다.

이를 촉발한 것은 세계 원자재시장이 둔화하면서 남미 국가들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다.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남미 경제는 빠른 성장을 바탕으로 원자재를 대거 사들이던 중국 경제가 주춤하자 직격탄을 맞았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에도 원자재시장 강세 덕에 승승장구하던 남미 경제는 나라 밖에서 불어온 찬바람에 ‘민낯’을 드러냈다. 브라질과 칠레 등 일부 국가에선 대통령이 관련된 부패 스캔들이 겹치면서 국민이 좌파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

‘경제 한파’에 지친 국민, 변화 요구

1999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시작으로 잇달아 집권한 남미 좌파 정부들은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냈다. 2003년 당선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국가 재정의 30%를 복지에 쓰고 연금 대상자를 늘렸다. 2007년 남편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어 당선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정부 지급 연금을 두 배로 올렸다. 2002년 집권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2005년 당선된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로벌 리포트] '경제 한파'에 등돌린 표심…남미 대륙에 '우파 바람' 분다
원자재시장이 호황일 땐 아무래도 좋았다.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해도 경제는 잘 굴러가는 듯이 보였다. 2000년대 초부터 중국 등 신흥국이 급성장하면서 원자재를 빨아들였다. 원자재 강세장(슈퍼사이클)의 시작이었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 경제는 원자재 의존도가 높다. 브라질은 지난해 전체 수출액 중 원자재 수출이 49%를 차지했다. 베네수엘라는 원유가 수출액의 95%를 차지한다. 많은 남미 국가가 2000년대 중반 연 5~10%의 고성장을 이어갔다. 2010년께부터 중국의 경제 성장이 주춤해지고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자 경제 취약성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남미 최대 경제대국인 브라질의 올해와 내년 성장률을 각각 -3%, -1%로 전망하고 있다. 브라질 공공부채는 지난 8월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65.3%로, 브라질 중앙은행이 집계를 시작한 이후 가장 높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유 가격이 반토막나면서 달러가 부족해져 공산품 수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산품 가격은 속수무책 올랐다. 서민을 위한다는 이유로 공산품 가격을 통제해 온 정부 정책 때문에 제조업 기반이 무너져 타격이 더 컸다. 아르헨티나도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68.5%였고, 올해는 80%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다. 칠레 여론조사기관 라티노바로메트로의 마르타 라고스 대표는 월스트리트저널에 “돈이 떨어지면 포퓰리즘도 없는 법”이라고 남미의 현 상황을 꼬집었다.

끝이 보이는 남미의 ‘분홍 물결’

아르헨티나 새 대통령으로 뽑힌 중도우파 성향의 마크리는 당선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포퓰리즘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자유시장주의와 개방경제 정책 도입을 약속하고, 전기 가스 교통요금 등에 대한 각종 보조금도 깎기로 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마크리 당선 다음날 아르헨티나 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바꿨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우파 바람이 다른 남미 국가로 확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남미에서 선거를 통해 좌파가 집권하는 현상인 ‘분홍 물결(pink tide)’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도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2013년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근 22%까지 떨어졌다. 다음달 6일로 예정된 총선거에선 차베스가 집권했던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우파 야당이 승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야당이 20%포인트 이상 앞선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를 밑돈다. 대통령 지지율이 물가상승률(11월 기준 10.28%)보다 낮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집권 여당 의원들이 국영에너지회사인 페트로브라스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부패 스캔들도 호세프 대통령의 지지율을 갉아먹은 요인이다. 낮은 지지율에 탄핵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칠레의 어머니’로 불리며 높은 인기를 자랑하던 바첼레트 대통령도 최근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2010년 첫 번째 임기를 마칠 때만 해도 지지율이 85%에 달했지만 9월 현재 24%로 곤두박질쳤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1.9%에 머문 데다 아들 세바스티안 다발로스가 칠레은행에서 부당하게 돈을 빌려 부동산에 투기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마크리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남미 국민이 경제 성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며 “남미 좌파 정부가 청렴한 정부 운영과 경제 성장에 실패하면서 중도 우파에 기회가 왔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아르헨티나의 정권 교체는 남미 변화의 시작”이라며 “아르헨티나에 이어 베네수엘라 총선, 2018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도 우파가 선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