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 김태호 씨가 자신의 작품 ‘내재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추상화가 김태호 씨가 자신의 작품 ‘내재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90년 50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승조 화백은 파이프처럼 생긴 원통의 이미지를 반복해 그려 ‘파이프통 작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평생 존재와 실체, 이미지의 재현이라는 화두 속에서 고뇌한 그는 기하학적 추상화 장르를 선도하며 1960~70년대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했다. 원통 이미지를 반복해서 변주한 그의 작품은 착시현상과 함께 환영의 효과를 일으키는 옵티컬아트(시각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화백을 비롯해 김인겸 박석원 이강소 오수환 김태호 박영남 등 1940년대 태어난 인기 작가 7인의 작품을 모은 대규모 추상화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가 14일부터 다음달 29일까지 펼치는 ‘물성을 넘어, 여백의 세계를 찾아서-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1’전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는 물질 자체의 속성을 표방하던 미니멀리즘이 지배하던 화단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실험을 지속한 이들의 작품 60여점이 걸린다. 1960~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초창기를 주도했던 이들 작품을 통해 시대를 앞서갔던 작가 정신을 음미해보는 동시에 추상미술의 조류를 살펴볼 수 있다.

작가들은 색띠로 만들어진 원통구조의 그림부터 벌집 모형의 단색화, 미니멀리즘처럼 군더더기 없는 그림, 돌을 재료로 한 추상조각까지 망라해 한국 추상예술의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서양미술의 추상성과 동양미술의 절제미를 추구한 이강소(72)는 현실 저 너머의 사이버 공간 같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먹선으로 묘사한 작품 10여점을 내놓는다. 하얀 캔버스에 펼쳐진 먹선들은 문자나 기호처럼 정제된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맑은 감성을 유인한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서체(書體)추상’을 개척한 오수환(69)은 자연, 우연, 무위(無爲)사상을 화려한 색띠로 응축한 작품 5~6점을 내놨다. 오방색의 화려함을 연상시키는 색채들은 다소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자유로우면서도 다이내믹한 필획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노자와 장자가 말한 ‘무위자연’을 그림으로 읽어낸 게 흥미롭다.

한국 단색화의 계보를 잇는 김태호(67)는 색감 쌓기와 긁어내기 화법으로 사유의 세계를 명쾌하게 녹여냈다. 물감을 겹겹이 쌓아 수백개의 벌집 구멍을 수직과 수평으로 쌓고 덜어내며 내재율을 응축한 작품에서는 재치와 상상력이 넘친다. 작가는 “내 작업은 결코 우연성이 아닌 철저한 장인 기질에 의한 창조적 실천”이라고 설명했다.

평면과 공간의 경계를 아우른 김인겸(70)의 작품, 캔버스에 물감을 손으로 직접 긋거나 바른 박영남(66)의 서정적인 추상화, 돌과 같은 자연물을 절단하고 쌓아올려 예술적 가치로 승화한 박석원(73)의 조각 등도 작가의 손맛을 듬뿍 전해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능동적으로 마음껏 창조하는 삶을 열어 가는 추상화가들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02)72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