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국민연금의 태생적 부도덕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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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대중에 대한 뇌물이 복지 기원
공적연금 커질수록 국가 재정 파괴
국가가 노후 걱정한다는 신화 깨야
정규재 주필
공적연금 커질수록 국가 재정 파괴
국가가 노후 걱정한다는 신화 깨야
정규재 주필
프랑스와의 전쟁에 끌려갔던 촌놈들은 바람이 잔뜩 들어 돌아왔다. 그들은 파리서 주워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떠들어대면서 도시를 휘젓고 다녔다. 그들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정년 제도를 만들어 늙은 노동자를 집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청년들을 취직시켰다. 귀향하는 늙은 노동자들에게는 노후연금이라는 약속이라도 들려서 돌려보낼밖에…. 그렇게 국민연금은 태어났다.
복지국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선거가 복지를 만들어 냈다는 설이다. 한국에서의 무상급식 논란은 그 본질을 잘 보여준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복지는 커지고 다양해진다. 다양한 선거집단을 위해 맞춤형 복지도 필연적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을 구분할 실익도 없다. 그러나 선거 아닌 권위주의 정치가 복지 친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복지는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태어났다. 권위주의체제였다. 민주주의를 앞서 도입한 미국이나 스위스, 호주 등은 복지국가 개념이 약하다. 그들은 국가가 나의 노후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그들은 ‘복지=세금’이라는 점을 잘 아는 현명한 국민이다.
복지가 전쟁의 대가로 태어났다는 점은 독일과 영국이 공통적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베버리지 보고서가 그랬다. 소위 두 번에 걸쳐 총력전을 치러낸 국민들에게 위안거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보불전쟁이 19세기 말 유럽 사회에 심층적인 변화를 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쟁-복지론’은 일리가 있다. 스웨덴이 1920년대에 서둘러 복지국가로 이행한 것은 소련 공산주의로부터 결정적인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혁명을 당하는 것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퍼주는 것이 낫다는 궁지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복지주의자들은 종종 폭동을 위협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폭동을 위협한 다음 슬쩍 서민복지 아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서 자기의 숟가락도 들고 뛴다.
스웨덴은 소련이 망한 1990년 이후에야 보편적 복지를 포기했다. 부유세와 상속세를 폐지하고 국민연금의 일부를 민영화한 것도 이때였다. 스웨덴의 복지 70년은 옛 소련의 지배기간과 일치한다. 복지는 그렇게 정치적 뇌물로서의 본성을 갖는다.
보통선거권은 보편적 복지, 다른 말로 무차별 복지를 만들어 낸다. 고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경쟁하는 권력 집단은 복지를 경매에 부치는 것으로 대중을 매수하려 든다. 복지가 시민권으로까지 격상된 것은 2차 대전 이후다. 믿거나 말거나 국민이 곧 권력자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복지는 이제 인권이 그런 것처럼 시민의 청구권에 기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보편적 복지에는 도덕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복지를 시민권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국가에 대한 청구권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지를 칸트나 애덤 스미스의 선례를 따라 ‘이타심에 기반한 동정·공감하는 도덕적 행위’로 본다면 우리는 보편적 복지를 당장 포기해야 한다. 그것에는 자비심도 영혼도 없다. 국민연금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너의 노후가 걱정된다. 너의 소득을 국가에 맡기면 30년 후에 매달 얼마씩 돌려주겠노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국가는 자애로운 자산관리자였던 적이 없다.
20세기는 대중 정치의 시대다. 복지제도, 특히 보편적 연금 제도는 국민을 아이 취급하는 것과 같다. 복지는 사회적 약자 혹은 굳이 존 롤즈의 말을 빌리면 ‘최소 수혜자’에게 주는 것이라야 마땅하다. 연금을 둘러싼 이 어처구니없는 소동이라는 것이 20세기에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정치적 인간들의 아둔함을 드러낼 뿐이다. 지금은 모든 국가에서 복지를 줄이느라 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나는 정치인 누구에게도 노후를 의탁한 적이 없다. 김무성이나 문재인, 심지어 정청래 같은 분들이 나의 노후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싫다. 그러니 40%니 50%니 하는 나의 노후에 대한 걱정들을 부디 거두어 달라. 복지는 서민복지가 맞다. 그게 도덕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복지국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선거가 복지를 만들어 냈다는 설이다. 한국에서의 무상급식 논란은 그 본질을 잘 보여준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복지는 커지고 다양해진다. 다양한 선거집단을 위해 맞춤형 복지도 필연적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을 구분할 실익도 없다. 그러나 선거 아닌 권위주의 정치가 복지 친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복지는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태어났다. 권위주의체제였다. 민주주의를 앞서 도입한 미국이나 스위스, 호주 등은 복지국가 개념이 약하다. 그들은 국가가 나의 노후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그들은 ‘복지=세금’이라는 점을 잘 아는 현명한 국민이다.
복지가 전쟁의 대가로 태어났다는 점은 독일과 영국이 공통적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베버리지 보고서가 그랬다. 소위 두 번에 걸쳐 총력전을 치러낸 국민들에게 위안거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보불전쟁이 19세기 말 유럽 사회에 심층적인 변화를 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쟁-복지론’은 일리가 있다. 스웨덴이 1920년대에 서둘러 복지국가로 이행한 것은 소련 공산주의로부터 결정적인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혁명을 당하는 것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퍼주는 것이 낫다는 궁지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복지주의자들은 종종 폭동을 위협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폭동을 위협한 다음 슬쩍 서민복지 아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서 자기의 숟가락도 들고 뛴다.
스웨덴은 소련이 망한 1990년 이후에야 보편적 복지를 포기했다. 부유세와 상속세를 폐지하고 국민연금의 일부를 민영화한 것도 이때였다. 스웨덴의 복지 70년은 옛 소련의 지배기간과 일치한다. 복지는 그렇게 정치적 뇌물로서의 본성을 갖는다.
보통선거권은 보편적 복지, 다른 말로 무차별 복지를 만들어 낸다. 고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경쟁하는 권력 집단은 복지를 경매에 부치는 것으로 대중을 매수하려 든다. 복지가 시민권으로까지 격상된 것은 2차 대전 이후다. 믿거나 말거나 국민이 곧 권력자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복지는 이제 인권이 그런 것처럼 시민의 청구권에 기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보편적 복지에는 도덕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복지를 시민권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국가에 대한 청구권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지를 칸트나 애덤 스미스의 선례를 따라 ‘이타심에 기반한 동정·공감하는 도덕적 행위’로 본다면 우리는 보편적 복지를 당장 포기해야 한다. 그것에는 자비심도 영혼도 없다. 국민연금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너의 노후가 걱정된다. 너의 소득을 국가에 맡기면 30년 후에 매달 얼마씩 돌려주겠노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국가는 자애로운 자산관리자였던 적이 없다.
20세기는 대중 정치의 시대다. 복지제도, 특히 보편적 연금 제도는 국민을 아이 취급하는 것과 같다. 복지는 사회적 약자 혹은 굳이 존 롤즈의 말을 빌리면 ‘최소 수혜자’에게 주는 것이라야 마땅하다. 연금을 둘러싼 이 어처구니없는 소동이라는 것이 20세기에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정치적 인간들의 아둔함을 드러낼 뿐이다. 지금은 모든 국가에서 복지를 줄이느라 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나는 정치인 누구에게도 노후를 의탁한 적이 없다. 김무성이나 문재인, 심지어 정청래 같은 분들이 나의 노후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싫다. 그러니 40%니 50%니 하는 나의 노후에 대한 걱정들을 부디 거두어 달라. 복지는 서민복지가 맞다. 그게 도덕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