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의 '甲질' 연비회의
국내 완성차업체의 A임원은 지난 금요일(19일) 오전 환경부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월요일 오전 9시30분 정부세종청사에서 연비(또는 온실가스 배출) 기준 관련 회의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9월 초 장기 연비 개선 목표치를 발표한 환경부가 후속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협의하자는 취지였다.

환경부는 2020년까지 국내 판매 자동차의 평균 연비를 현재보다 42.9% 개선해 선진국 수준(24.3㎞/L)으로 맞추라고 발표했다. 이를 못 맞추면 과태료를 문다.

이날 회의는 연비 산정 때 어떤 완화 조건을 둘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달성하기 어려운 연비 개선 목표치를 받아든 업계로선 빠져서도 안 되고, 빠질 수도 없는 회의였다. 22개 수입 자동차를 포함해 27개 국내외 자동차업체에서 30여명의 담당 임원(급)이 세종시로 달려갔다.

회의 후 반응이 재미있다. 몇몇 업체를 대상으로 취재를 했다. B임원은 “환경부에서 공개하기 전까지 내용을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C씨는 “우리 입장을 잘 알지 않느냐. 불만이 있어도 지금 상황에서 결과를 누설했다가 밉보이면 죽는다”고 하소연했다.

익명을 전제로 어렵사리 전화 인터뷰에 응한 D임원은 “갑질도 이런 갑질이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내용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절차에 관한 얘기다. 보통 정부 부처에서 관련 업계 회의를 할 때는 최소 1주일 전 공지가 기본이다. 주말에 월요일 회의를 통보하는 것은 상식 밖이라는 얘기다.

거기다 회의 장소가 세종시다. 국내 자동차 회사 본사는 대부분 서울에 있다. 이 때문에 회의를 하려면 두세 명의 공무원이 서울로 올라오는 게 효율적이다. 30여명을 월요일 아침부터 세종시로 부른 것은 ‘갑’이 아니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태라는 지적이다. D임원은 “칼자루를 쥐고 있는 환경부가 오라니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환경부 담당자는 이에 대해 “연말까지 안건을 확정해서 관보에 게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그동안 업계 의견을 충분히 들었고, 원하는 것을 많이 담았기 때문에 30일 또는 31일 발표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균 연비를 계산할 때 전기자동차는 휘발유차 3대로 계산하고, 경차나 친환경차를 많이 팔아 판매 차량의 평균 연비가 낮아졌을 경우엔 초과 실적을 다음해로 이월 계산하도록 허용하는 등의 ‘완충장치’를 넣었다는 설명이다.

업계는 이 같은 조치에 만족할까. 한 관계자는 “유럽의 경우 연비 목표치를 발표한 후 이를 확정하는 데만 1년반, 일본도 1년씩 걸렸다”며 “이런 절차를 4개월 만에 끝내는 것은 과도한 행정조치”라고 지적했다. 규제자와 피규제자 간 회의가 아니라 유관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들까지 모여 달성 가능한 목표인지, 달성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놓고 충분히 토론해야 뒤탈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주창하는 마당에 환경부 관료들의 고압적인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게 산업계의 불만이다.

박수진 산업부 차장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