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경성 고민상담소' 펴낸 KAIST 전봉관 교수

기혼 남성이 미혼 여성과 연애하고, 여성은 남성이 처자식이 있는 줄 알면서도 동거를 시작한다.

남편은 아내를 때리고,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간통녀로 취급된다.

성관계 후 재미가 시들해졌다며 애인을 버리는 남성이 있는 반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하는 여성도 있다.

1930년대 일간지 독자문답란에 흔히 등장하는 사연이다.

믿기 어렵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이 같은 독자문답란의 사연을 통해 한국 근대 시대상을 실감 나게 풀어간 책이 최근 출간됐다.

바로 '경성 고민상담소'(민음사 펴냄)다.

저자 전봉관 KAIST(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과 교수를 25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1930년대 성과 사랑은 현재보다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며 "몇십 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현 20대가 더 윤리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책은 근대의 성, 사랑, 가족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근대 한국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 늘 궁금했던 전 교수는 당시 신문을 뒤적거리다 독자문답란을 만났다.

사람들이 상담 코너를 통해 내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을 본 그는 '이거다' 싶었다.

그리고 만 5년의 기간에 500여 편의 사연을 샅샅이 살펴봤다.

'독자 상담으로 본 근대의 성과 사랑'이라는 부제가 딱 맞아떨어지는 이유다.

전 교수는 "조혼(早婚) 풍습만 해도 관련 논문만 수십 편이지만 법체계나 제도만 다루지 조혼의 고통에 대해선 주목하지 않는다"며 "당시 사람들이 조혼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이 같은 개개인의 사연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을 읽다 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적나라한 사연들에 종종 충격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상에서 겨우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근대 한국인들은 신문에 대놓고 한다.

경성 일 여성, 시내 답답생 등으로 상담자를 익명 처리하던 신문도 어느 사연에선 실명을 밝히기도 한다.

프라이버시나 사생활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그는 "생활과 직업공간이 같은 전근대 농경사회에선 공적, 사적영역의 구분이 없었다"며 "근대에 민법이 들어오며 법적으로 명예훼손이라는 개념은 존재했지만 사생활을 보호해야한다는 인식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1900년대 독립신문 광고를 보면 아들이 도장 가지고 도망갔으니 믿지 말라며 아들의 실명과 주소까지 공개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 교수는 애초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문학 전공자였다.

그러나 역사와 문학이 모두 다루지 않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더 관심이 갔다.

박사학위 취득 후 본격적으로 근대문화 연구에 나선 그는 근대 조선의 살인, 스캔들, 투기, 자살 등을 범상치 않은 주제로 책을 펴냈다.

목 잘린 아이 사건을 토대로 일반인의 삶을 조명한 '경성기담', 1920∼40년대 조선의 투기 열풍을 정리한 '럭키금성', 근대 조선의 충격적 자살 사건을 다룬 '경성자살클럽' 등이 그 예다.

전 교수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구분 자체에 정치성이 있다.

정치성과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문화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경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며 "경성을 공간이 아닌 시간 개념으로 봐달라"고 했다.

당시에도 성, 사랑, 가족은 인구의 절반 이상은 관심을 가지는 보편적 주제였다.

그는 특히 조혼의 폐해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강조한다.

춘원 이광수가 조혼 풍습의 피해자였다는 놀라운 사실도 제시된다.

전 교수는 "그 유명한 이광수도 조혼이라는 말 못할 고민으로 고통받으며 암흑과 같은 삶을 살았다"며 "이를 모르고 이광수의 고뇌를 어떻게 이해하겠냐. 이광수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연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기자, 사회 저명인사, 전문가 등이 해주는 답변이다.

성폭행을 당한 부인을 간통녀로 치부하는 남편에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은 법률상, 도덕상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변호사나 마음이 없는 본처와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했다는 남성에게 '냉정하시오'라고 다그치는 기자는 독자의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사연은 상담자가 조작할 수 있지만 답변은 그 시대의 보편적 윤리, 상식을 보여준다"며 "본처를 놔두고 신여성과 사귀는 남성을 답변자 아무도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잘못은 시대에 있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성과 사랑 외에도 진로는 근대 한국인의 주요 고민 중 하나였다.

전 교수는 기회가 된다면 이런 고민을 묶어 후속작을 쓰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1920∼30년대이에요.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현재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또 달라도 이해가 잘 될 겁니다.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vivi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