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압박에 '무타협' 선언…역사수정 행보 신호탄 가능성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 수정 시도를 사실상 공식화함에 따라 파장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28일 고노담화를 검증할 조사팀을 정부내에 설치하겠다고 밝히고 조사팀 검토 결과 고노담화를 대신할 새로운 담화를 낼지에 대해 "어떻게 할지 충분히 검토하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지난 25일 일본유신회가 검증팀을 국회에 설치하는 방안을 제안했을 때 "국회 논의에 맡기겠다"던 입장에서 사흘 만에 정부가 직접 나서는 쪽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고노담화가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의 담화였다는 점에서 현 관방장관인 스가의 발언은 그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결국 새로운 담화를 통해 고노담화를 대체하는 것도 시야에 둔 발언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검증은 결국 2007년 제1차 아베 내각이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통해 내놓은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 군과 관헌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확인하는 수순이 될 공산이 크다.

야마시타 요시키(山下芳生) 일본 공산당 서기국장은 최근 "(전쟁) 당시 문서는 전부 소각됐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검증할 방법도 없다"며 "남아있을 리 없는 것을 일부러 거론해 고노담화 전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 강제연행 증거가 없다'는 아베 내각의 입장이 허위라는 점은 이미 일본군이 1944년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연행해 자바섬 스마랑 근교에 억류하고 위안부로 삼은 사건을 단죄하기 위해 전후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열린 BC급 전범 군사재판의 공소장과 판결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들 문서는 도쿄의 국립공문서관이 보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검증'을 하겠다는 것은 결국 고노담화 당시 청취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증언에서 모순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토대로 군위안부 제도라는 '전쟁범죄'를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일'로 치환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또 사실상 '강제연행의 증거는 없다'는 결론을 내 놓은 채 실시하는 자의적 '검증'의 결과는 고노담화를 대체할 새로운 담화의 발표로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전망이다.

아베 정권의 고노담화 부정 행보는 작년 말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이후 한국·중국은 물론 미국까지 반발하고 있는 '역사 수정주의 행보'를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미 아베 총리는 2102년 12월 재집권을 전후해 고노담화 수정의지를 표명하고, 패전 70주년인 2015년 '아베담화'를 발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50%를 넘는 높은 지지율을 향유하고 있는 아베 정권이 일본 사회 전반의 우경화 흐름 속에 고노담화와 식민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사죄한 무라야마(村山) 담화 수정, 더 나아가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을 단죄한 극동군사재판(도쿄재판)에 대한 재평가 등 우익들의 숙원 풀기에 나설 가능성은 일정부분 예상됐던 바이기도 하다.

고노담화 수정 행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아베 정권이 한국, 중국과의 갈등심화를 감수하는 것은 물론 미국에 맞서려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고 평가했다.

4월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에 요구해온 한일관계 개선에 중대 악재가 될 고노담화 수정에 발을 내디디는 것은 결국 미국의 압박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아베 총리의 보좌관인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실망했다'며 반발한 미국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올린 것에서 표출됐듯 아베 정권의 핵심인사들 사이에서는 역사문제에서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총리관저 상황을 잘 아는 한 소식통은 "아베 총리 주변 인물 사이에서는 미국의 힘이 예전 같지 않으며 안보와 경제면에서 일본의 협력을 받아야 하는 미국의 사정상 일본에 대해 '선'을 넘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이종원 와세다대 교수(국제정치 전공)는 "아베 정권이 외교전략적 고려보다는 역사에 대한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고, 미국의 압력에 더 이상 타협하면 안된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 같다"며 "국방예산을 삭감한 미국이 동아시아 안전보장 차원에서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본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군위안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에 역행하는 아베 정권의 고노담화 수정 행보가 일본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조세영 동서대 교수는 최근 "중국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에 나섰고 미국도 관심을 보이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국제화했다"며 "이 문제는 일본 입장에서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커질 문제"라고 말했다.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jh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