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퍼링·정치불안 '겹악재'…통화가치 40일만에 15% 하락
유로본드 발행 호황…"정치불안, 신용등급에 이미 반영"

터키 리라화 가치가 11일 연속 사상 최저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신흥국 금융불안의 중심지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의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과 중국 경제의 경착륙 우려, 신흥국 금융불안 등 '삼각 파고'에 리라화 가치는 최근 40일 동안 15% 급락했다.

터키는 지난달 17일 집권당을 강타한 사상 최대 비리사건 수사를 계기로 정국 불안이 심화하고 있어 다른 신흥국보다 통화 절하 속도가 빠르다.

예측이 어려운 정치 불안 변수는 오는 3월30일 지방선거 전에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8월 대통령 선거와 내년 초 총선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다만 터키 정부가 최근 발행한 유로본드가 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고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정치 불안 요인이 이미 신용등급에 반영됐다고 밝혀 국가부도 등의 심각한 위기로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진단된다.

◇리라화, 11일 연속 사상 최저…'비리 스캔들' 이후 15% 하락
리라화 하락세는 '비리 스캔들'이 터진 지난달 17일부터 시작됐으며 다음 달 미국의 테이퍼링 결정이 겹치자 더욱 가팔라졌다.

리라화는 27일(현지시간) 장중 달러당 2.36리라까지 떨어져 11일 연속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리라화 가치는 '비리 스캔들' 직전인 지난달 16일(달러당 2.02리라)보다 15% 이상 떨어졌다.

터키의 보수 이슬람 집권세력의 내분으로 시작된 정치 불안은 집권당의 사법 기관 장악 시도를 계기로 야당과도 격렬하게 충돌해 좀처럼 봉합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리라화는 이런 정치 불안이 가중될 때마다 연일 사상 최저 기록을 낮춰가며 이날까지 11일 연속 하락해 1996년 이후 최장 하락이란 기록도 세웠다.

리라화 절하와 높은 물가 상승률에도 터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동결해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중앙은행이 2년 만에 외환시장에 직접 매도 개입에 나섰지만 리라화 하락세를 막지 못했다.

결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동결한 지 1주일 만인 28일 다시 긴급 통화정책위원회를 소집해 리라화 가치를 안정시키고자 필요한 조치를 논의한다고 밝혔다.

터키 금융시장은 지난달 18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이후 주가는 9% 하락했고 국채금리는 0.35%포인트 올랐으며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도 0.57%포인트 상승했다.

터키는 2009년부터 유망한 신흥시장으로 떠올라 2012년까지 외국인 주식투자가 123억달러 늘었으나 지난해 전국적 반정부 시위가 최고조였던 6월부터 정정 불안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에 따라 연말까지 1억3천만달러 순유출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현재 터키의 정정 불안이 언제까지, 얼마나 확산할 것인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3월30일 열리는 지방선거가 1차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집권당 지지율이 지난 2011년 총선에는 50%였으나 최근 단독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수준인 42%로 떨어졌고 8월 대선과 내년 초 총선이 예고돼 정정 불안의 장기화 우려도 나오고 있다.

HSBC는 지난 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올해 터키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3.1%에서 2.2%로 하향조정하고 1분기 리라화 가치도 달러당 1.95리라에서 2.3리라로 조정했다.

HSBC는 정치 불안은 여름까지 이어져 기업과 투자자들의 심리가 위축되고, 이번 비리사건이 대부분 건설업체와 관련됨에 따라 내수 위축으로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HSBC는 특히 올해 소비자물가도 7%대로 중앙은행의 목표치를 웃돌 것으로 예상돼 중앙은행은 1분기에 오버나이트 금리를 현 7.75%에서 9.0%로 인상할 것으로 내다봤다.

긴축적 통화정책과 리라화 급락에 따른 물가상승, 지난해 말 정부가 강화한 소비 억제 정책 등에 따라 민간소비 역시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HSBC는 연말 예상 환율은 달러당 2.10리라로 제시해 정치 일정이 일단락되는 하반기부터 금융시장이 안정될 것으로 내다봤다.

◇"터키, 부도는 없다"…유로본드 발행 인기
터키 경제가 금융불안과 내수위축 등에 따른 타격은 불가피하지만 아르헨티나처럼 심각한 위기에 놓일 것이란 우려는 크지 않다.

실제로 지난 23일 터키가 입찰한 25억달러 규모의 유로본드는 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해 발행에 성공했다.

영국의 국채투자회사인 스피로는 터키는 과거 금융위기에도 부도를 낸 적이 없어 채권 투자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다만 조달비용만 올라갈 뿐이라고 밝혔다.

알리 바바잔 경제부총리도 "유로본드 발행 성공은 터키 경제의 장기적 전망에 투자자들이 신뢰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터키 정부는 유로본드 발행 성공 이후 금융시장 불안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것이라며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4%를 유지한다고 강조했다.

바바잔 부총리는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리라화 가치 하락은 "가격 재조정 과정"이라며 중앙은행이 적절한 정책을 펴고 있고 금융 부문의 건전성에 따라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도 지난달 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테이퍼링이 터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단기적이고 제한적이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터키가 2009년 이후 자본유출입 변동성 확대를 예상하고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무디스는 설명했다.

무디스는 또 지난 9일에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정치적 불안은 현재 신용등급에 이미 반영됐다고 밝혔다.

무디스는 지난해 5월 20년 만에 터키의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등급(Baa3)으로 상향했다.

다른 신평사인 피치도 지난 7일 최근 정국 혼란은 단기적으로 신용등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다만 피치는 "정국 불안이 지속되면 정부 기능이 약해지고 경제 안정을 유지할 정책결정이 적시에 이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며 장기화로 신용도가 약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터키 이쉬증권의 셰르하트 귤레이옌 분석가는 "터키가 정치적으로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정국 불안으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사례는 있지만 실물경제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 불안이 1분기 내수 부문에 충격을 주겠지만 올해 내내 경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재정도 내수 부진에 대응할 여력이 있으며 기업들도 올해 경제가 연착륙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덧붙였다.

HSBC 신흥국주식투자분석부 존 로맥스 부장은 지난 7일 보고서에서 테이퍼링의 부정적 영향은 터키 주가에 이미 반영됐고 아직 저평가 상태로 지금은 터키 주식을 팔 시점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준억 특파원 justdus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