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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줄과 날줄] 발아를 예비하는 땅속 씨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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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은 짧고 어둠은 길고 긴 冬至
    그 속에 작은 사랑의 불씨 한점
    생명은 그렇게 꿈처럼 피어나는 법"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
    [씨줄과 날줄] 발아를 예비하는 땅속 씨앗들
    이미 설악산 대청봉에 첫눈이 오고 서울에는 첫얼음이 얼었다. 작은 동네 서점에 들렀더니,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으며, “올해는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한다. 문득 마지막 달이 코앞에 닥친 것을 실감하며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 빨라지는 것은 왜일까?

    동짓달은 음력으로 11월이다. 태양의 남중고도(南中高度)가 가장 낮고, 낮은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든 달이다. 삭풍이 불고 한파가 몰아친다. 식물들은 성장을 멈추고, 야생 짐승들은 먹이를 구하는 일이 난감하다. 양서류와 파충류들은 아예 땅속으로 숨는다. 동짓달은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시련 속에서 너도나도 한껏 제 존재를 낮추고 웅크리는 고난의 시절이다.

    누리에는 빛이 줄고 어둠이 많으니 음의 기운도 가장 세다. 일조량이 줄 뿐만 아니라 긴 밤들이 온다. 낮과 낮의 시간 사이에 낀 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빛의 세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사람은 어둠의 동굴인 엄마의 자궁에서 열 달을 보낸다. 자궁 속에서 태아는 자율신경의 지배만을 받는 식물적 존재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태아는 자궁에서 인류의 전 역사를 제 뇌 속에 새긴다. 밤은 어린 몸과 정신이 자라도록 온갖 자양분을 흘려보내주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밤에 빚지며 삶의 절반을 빚는다. 주로 낮에 움직이며 낮에 노동을 하니, 사람은 굳이 구분하자면 낮의 생물이다. 하지만 지구 바깥의 광활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다. 태양과 지구는 오로지 캄캄한 밤과 밤으로 이어지는 우주 공간에서 외롭게 제 궤도를 도는 별이다.

    책을 읽다가, 막 태어난 새끼 고양이는 어미가 충분히 핥아주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흠칫 놀랐다. 새끼 고양이는 신경 말단이 깨어나는 데 꼭 필요한 촉각의 흥분이 없으면 혼수에 빠진다고 한다. 아아, 모든 생명은 이 세상에 오는 순간부터 환대받아야 한다. 어미가 갓 태어난 새끼의 몸통을 핥아주는 것은 “그래, 이 세상에 잘 왔구나!” 하고 어미가 새끼에게 보내는 환대의 신호인 셈이다. 프랑스 작가 로멩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내놓은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썼다. 아기는 품고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지 않아도 죽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도착할 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관심과 냉대로 팽개쳐져 생긴 상처를 무의식에 각인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남과 사랑을 나눌 줄도 모른 채 다른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며 인생을 헛되이 낭비한다.

    삭막한 밤과 어둠의 시절이라고 사랑의 불씨 한 점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동짓달은 역경(易經)의 12괘 차례 중에서 복괘(復卦)에 해당하는데, 이 괘는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일러준다. 사랑은 만물이 생성하는 기초 조건이다. 음의 기운으로 덮인 세상이 춥고 어두워도 생명은 태동하고 땅속 씨앗들은 발아를 예비한다는 것을 옛사람들도 알았다. 서정주는 ‘동천(冬天)’에서 시인의 빼어난 직관으로 그 사실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옮겼다.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키어 가네.’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해 반전(反轉)을 한다. 누리에 찬 음의 기운이 줄고 꿈과 사랑의 불씨를 지피는 양의 기운이 차오른다. 이런 동지섣달의 곡절을, 시인은 제 마음이 품은 사랑의 씨앗을 맑고 곱게 키우는데 천 날 밤을 빌려 쓰는 사랑의 드라마로 옮겨 적었다. 과연 동천에 심은 사랑의 인연(因緣)은 숭고한 것이어서 매서운 새조차 감히 비켜가는 것이다.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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