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후덕죽의 칼'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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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믿고 책임 부여한 노장 셰프
'잘 한다' 격려 속 최고의 요리
흰머리와 주름은 연륜의 상징
해외선 '멋진 할머니' 뷰티트렌드
'MZ' '꼰대' 세대 간 힐난 대신
함께 레시피 만드는 사회 돼야정 소 람
정치부 차장
'잘 한다' 격려 속 최고의 요리
흰머리와 주름은 연륜의 상징
해외선 '멋진 할머니' 뷰티트렌드
'MZ' '꼰대' 세대 간 힐난 대신
함께 레시피 만드는 사회 돼야정 소 람
정치부 차장
그는 경연 내내 말보단 태도로 ‘어른의 품격’을 보여줬다. 팀 대항전에서 후배 임성근 셰프가 소스 담당을 자처할 때, 팀원들 사이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반신반의하는 눈빛 사이로 후 셰프는 짧고 단호하게 말한다. “여기(임 셰프)가 리더해.” 의심을 걷어내고 책임을 건넨 한마디였다.
이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은 이유는 우리 사회의 풍경과 정반대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댓글창 등 오늘날의 공론장엔 다른 세대를 향한 날 선 대화만 가득하다. 기성세대는 젊은 층을 ‘MZ’라는 편리한 카테고리로 묶어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집단’으로 치부한다. 반면 젊은 층은 나이 든 세대를 ‘꼰대’라고 칭하며 소통이 불가능한 상대로 규정한다. 나이듦은 무능과 아집, 젊음은 무례함과 미숙함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여기에 젊게 살고 싶어 하는 4050을 비난하는 ‘영포티’ 밈까지 등장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은 더 풀기 힘든 실타래가 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세대 간 단절 속에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도 감지된다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패션·뷰티업계와 라이프스타일 전반에서 유행하는 ‘그래니코어(Grannycore)’가 대표적이다. 그래니코어는 ‘무조건 젊게’를 원하는 안티에이징(anti-aging)과 달리 ‘조금 더 멋지게, 오래’ 사는 ‘롱제비티’(longevity)를 추구한다. 나이듦을 퇴화가 아니라 숙성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문화적 전환이다.
시니어가 누구보다 당당하게 꺼내놓는 오래된 취향과 그들만의 여유, 쿨한 언행과 위트는 의외로 젊은 층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젠지(Gen-Z·Z세대) 뷰티 브랜드로 꼽히던 리파이(REFY)는 최근 백발의 중년 모델들을 발탁하고, ‘아이코닉은 늙지 않는다’(Iconic never gets old)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바닷가 멋진 할머니의 옷차림을 흉내 낸 ‘코스탈 그래니’ 룩이 지난여름 패션계의 이목을 끈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의 뷰티 철학을 좇고, 연륜을 ‘힙함’으로 읽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묵은 세대 갈등을 풀 실마리를 본다. 젊은 세대가 바라는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후 셰프처럼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는 대신 후배의 전문성을 먼저 믿어주는 유연함, 손때 묻은 도구가 타인의 손에 들려 있더라도 ‘잘 쓴다’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함이 아닐까. 2024년 10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은 늘 “나이가 드는 건 축복”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유행 대신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면서도 젊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멈추지 않았다. 어른이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의 품을 내어줄 때 ‘꼰대’라는 주홍글씨는 어느새 흐릿해진다.
물론 신뢰가 한쪽의 노력만으론 완성되지는 않는다. 앞선 세대가 쌓아온 시간의 무게를 존중하고 배우는 건 젊은 세대의 몫이다. 어른의 경험은 단순히 낡은 것이 아니라 내가 열어보지 못한 오래된 레시피일 수 있다. 거장의 어깨 위에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소스를 만들어내는 일은 젊은 세대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다.
세대를 놓고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갈라진 우리 사회가 새해에는 조금씩 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나이가 벼슬이 아니라 품격인, 젊음이 무례가 아니라 활력이 되는 일상. 그런 문화가 뒷받침된다면 주방 밖 사회에서도 훨씬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서로의 칼과 소스를 공유할 때 가장 맛있는 요리가 탄생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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