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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칼럼] 난공불락, 약사 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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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주민 삼삼오오 모이던 약국
    사랑방 기능하며 정치력 강화
    약사 이권 철옹성처럼 굳어져

    약 배송·편의점 상비약 확대
    기득권 반대 막혀 번번이 좌절
    환자·국민 위해 규제 풀어야

    이지현 바이오헬스부 차장
    [토요칼럼] 난공불락, 약사 카르텔
    ‘약사 불패(不敗)’. 2000년 전쟁 같던 의약분업이 마무리된 뒤 의료계에 교훈처럼 남은 말이다. ‘처방은 의사에게 조제는 약사에게’ 받도록 한 개혁 방향을 두고 의사들은 “사실상 승자는 약사”라고 말한다. 건강보험에 약국 조제료가 신설되면서 약국에 지출한 건강보험 급여 비용이 2000년 1조2675억원에서 지난해 24조25억원으로 20배 가까이 불어나면서다. 같은 기간 건강보험 재정 지출이 10배가량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가파른 증가세다. 목이 좋은 지역에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들이 ‘처방전’만 발행해주는 병원을 열고 월급쟁이 의사를 고용하는 ‘편법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부터다.

    [토요칼럼] 난공불락, 약사 카르텔
    약사들이 승리한 당시 상황을 두고 의료계에선 체계적 분석도 이뤄졌다. 처방·조제 등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던 시대, ‘개방형 동네병원’이던 약국은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민심이 오가는 ‘정치 플랫폼’으로 약국이 성장하자 자연히 약사의 정치력도 높아졌다는 취지다.

    20여 년이 지났다. 약국의 정치 플랫폼 기능이 여전한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지만 ‘약사와의 싸움에선 이길 수 없다’는 말만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비대면 약 배송, 편의점 상비약 판매 등 약사 기득권이 걸린 정책은 번번이 ‘누더기 제한’을 달아 반쪽 신세가 되고 만다. 직능 간 갈등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보건의료계 상황을 고려하면 ‘길고 긴’ 생명력이다.

    지난 2일 비대면 진료 허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의사와 환자 간 첫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이 시작된 것은 2000년. 그동안 유비쿼터스(U)-헬스, 원격의료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정치적 공격’을 피해 온 비대면 진료는 38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 중 가장 늦게 한국에서 ‘불법’ 신세를 벗어났다. 2010년 첫 법안이 제출된 지 15년 만이다. 20여 년간 비대면 진료가 허용되면 ‘의료는 영리화할 것’이라고 실체 없는 주장만 하던 정치인들이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게 다행일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약 배송은 숙제로 남았다. 의료법을 뒷받침할 약사법이 바뀌지 않아서다. 약 배송 대상은 섬·벽지 거주자, 장기요양 수급자, 등록장애인, 1·2급 감염병 확진자, 희소질환자처럼 기존 시범사업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매번 같은 약을 처방받는 만성질환자조차 의사에게 비대면 진료를 받은 뒤 약을 사러 직접 약국에 가야 한다. 환자 불편을 줄인다는 법 취지를 고려하면 ‘난센스’다. OECD 국가 중 약 배송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미국에선 제약사가 직접 연 온라인 약국에서 약을 직배송하고 유통 비용을 줄여 약을 싸게 공급하는 게 일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다.

    늦은 밤 약을 사러 헤매는 환자를 돕기 위해 마련한 ‘편의점 상비약’ 제도도 사실상 답보 상태다. 편의점에서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파스 등 상비약 13종류를 팔게 된 것이 2012년이다. 13년이 지났지만 품목은 요지부동이다. 허용 품목 중 일부가 생산 중단돼 판매 가능한 상비약이 줄고 있지만 재논의 움직임은 없다. 상비약을 늘려달라는 국민 요구가 빗발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미국 일본 등에선 일반의약품도 약사 상담 없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약사들은 약을 환자에게 배송하면 상하거나 배송 사고가 날 수 있다며 반대한다. 이미 ‘새벽배송’ ‘맞춤 배달 서비스’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은 걸 약사들만 모르는 듯하다. 편의점 판매 약이 늘면 국민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과 달리 편의점 약 탓에 생긴 사고는 제로에 가깝다. 편의점에선 근육통에 붙이는 파스조차 1인당 하나밖에 살 수 없다. 이마저도 신분증까지 확인하는 검증 절차를 거친다. 반면 해외 보따리상이 약국을 다니며 약을 매점매석하는 사례는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오남용 위험은 제약 없이 약을 파는 약국이 더 클 것이란 주장까지 나오는 이유다.

    현실이 이런데도 개혁은 요원하다. 약 배송을 허용한 약사법 개정안은 언제 통과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정치권은 물론 정부에서도 “상비약이 확대되면 오남용이 늘 것”이란 주장이 나온다. 겹겹이 세운 안전망 덕에 오남용 위험은 크지 않다는 게 확인됐지만 약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정책은 환자와 국민을 향해야 한다. 카르텔을 깨는 게 그 시작이다. 특정 직역에만 예외가 있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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