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민간인 학살사건…진실규명불능 결정 뒤엎고 배상 판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 위원회)의 진실 규명불능 결정에도 법원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로 남게 된 영암 민간인 학살 사건 입증 과정은 극적이었다.

원고인 최모(81·여)씨 등 세 자매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12월 27일 아침 전남 영암군 서호면 외가에 영암경찰서 군서지서 소속 '이 순경' 등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왔다.

당시 18살이었던 장녀 최씨의 가족은 전란으로 시끄러운 고향 마을에서 나와 외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순경 등은 최씨의 어린 외사촌 동생의 가슴에 총을 겨누면서 아버지를 찾아 연행해갔다.

최씨는 아버지를 뒤따라가 군서지서 취조실에서 기다렸다.

자신을 딱하게 여긴 '주 주임'이라 불리는 경찰관의 권유로 외가로 돌아가던 최씨는 저녁밥을 지어 가져오는 어머니와 동생(당시 7살)을 만나 군서지서로 향했지만, 아버지에게 밥을 전달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경찰지서 모퉁이에서 기다리던 최씨는 오후 10시께 경찰관 두 명이 아버지의 양팔을 잡고 이동하는 것을 봤다.

30분쯤 뒤에 세 발의 총성이 들렸고 다음날 새벽 할아버지, 큰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

과거사 위원회는 그러나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의 진술이 없어 경찰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로 인한 사망인지 확인할 수 없다"며 진실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제3자의 신청으로 과거사 위원회의 조사 사실조차 몰랐던 최씨는 지난 6월 재경향우회에 나갔다가 솔깃한 소식을 들었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고향 사람이 법원에서 국가배상 판결을 받아 억울함을 풀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떠올린 최씨는 변호사를 찾아 상담한 끝에 지난 6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불능 결정일일 2010년 6월 29일이어서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도 대법원이 제시한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 소송의 소멸시효(결정일로부터 3년)를 넘길 뻔했다.

간신히 소송 요건을 충족한 최씨 등에게 남은 고민은 증거였다.

세자매 중 장·차녀의 진술이 전부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목포지원 민사 1부(박강회 지원장 겸 부장판사)도 고심할 무렵 사실조회 결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재판부가 원고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려고 경찰청에 사실조회를 한 결과 사망 주장 시점인 1950년 12월 27일 당시 군서지서에는 실제 '주OO'(당시 30세) 경위와 '이◇◇, 이XX, 이▲▲'(차례로 21, 22, 23세) 순경이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부는 자매들의 진술이 매우 구체적이고 일치한 점, 사실조회 결과, 과거사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원고들에게 진술기회가 없었고 조사 개시 사실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과거사 위원회의 진실 규명 불능 결정과 달리 국가 배상 판결을 했다.

위자료는 사망자에게 8천만원, 배우자에게 4천만원, 자녀에게 800만원으로 책정했다.

재판부는 숨진 아버지, 어머니, 장남 등의 상속관계를 따져 세 자매에게 각각 5천60여만원씩 국가로 하여금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다만 이번 판결은 목격자 등 제3자가 아닌 당사자인 원고들의 진술에 대한 의존도가 커 상급심에서 유지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강회 목포지원장은 "판결문을 작성하면서 대법원 판례와 하급심 기록을 살펴봤더니 진실 규명 불능 결정을 받고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사례는 없었다"며 "과거사 위원회의 결정이 최종 결정은 아닌 만큼 진실 규명 불능 결정이 났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목포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sangwon70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