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카리스마 李부장 알고보니 딸바보…딸에게 꽃다발 선물하려 꽃꽂이책 '열공'…동호회까지 활동
광고회사 O사에 다니는 김 과장은 직장 내 모든 워킹맘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육아와 가사를 위해 일찍 퇴근하는 대부분의 여성 직장인과 달리 회식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야근도 빠지지 않아 대리로 진급한 지 2년 만에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기 때문이다.

두 살배기 아들이 있는 김 과장이 회사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김 과장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교사인 남편 덕이 크다”며 남편에게 공을 돌렸다. 김 과장이 회사로 복귀하는 시점에 맞춰 남편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자신은 주말마다 결혼식과 돌잔치 등 각종 행사나 모임에 혼자 아이를 데리고 다니곤 한다. 남편이 주말에는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김 과장은 “벌이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내가 지금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며 “친정이 부산인 나와 달리 남편은 고향이 서울이라 시어머니도 종종 도와주시는데, 정말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직장인의 상황이 김 과장과 같은 것은 아니다. 힘든 직장 생활을 견뎌내며 가정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꽃꽂이 배우는 카리스마 이 부장

얼마 전 유통 대기업 L사 기획팀이 크게 술렁이는 일이 있었다. 기획팀장이 집안 사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돼 총무팀장이었던 이 부장이 새로운 기획팀장으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기획팀 직원들이 술렁인 이유는 단순히 기획팀장이 바뀌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 부장이 사내에서 ‘카리스마 리’로 통할 정도로 악명이 높아서였다.

소문은 맞았다. 이 부장과 첫 대면한 직원들은 “눈빛이 매섭다” “말투가 마치 군인 같다” “말대꾸하면 안 될 것 같다” 등 제각각 느낀 점을 내놓았다. “대면식 끝나면 보고하러 오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이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 과장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후 보고를 위해 찾아간 김 과장의 눈에 하얀 포장지로 제목이 보이지 않게 싼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무슨 책인지 궁금한 나머지 책을 들춰 본 김 과장은 깜짝 놀랐다. 이 부장이 읽고 있는 책이 다름 아닌 ‘꽃꽂이 달인 되기’였던 것.

바로 그때, 자리로 돌아온 이 부장에게 책을 들고 있는 걸 들킨 김 과장은 속으로 ‘죽었구나’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부장은 “김 과장, 옥상으로 올라오세요”라는 말만 남겨두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옥상에서 김 과장을 마주한 이 부장이 얼굴이 빨개진 채 대면식 때와는 180도 다른 상냥한 말투로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김 과장, 사실은 말이지….”

자초지종을 들은 김 과장은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다섯 살 딸 아이가 꽃을 좋아해 직접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 주기 위해 관련된 책을 읽고 있는 거였어요. 회사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서운 부장으로 통하지만 천상 ‘아빠’인 거죠. 이때부터 오히려 부장님과 허물없는 사이가 돼서 지금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딸바보’인 부장님의 카리스마에 금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꽃꽂이 책을 읽거나 꽃꽂이 동호회 하는 건 절대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아들 위해 경쟁 프로야구팀 응원

대기업 S전자에 다니는 박 차장은 프로야구 마니아다. 책상 여기저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유명 선수들의 사진을 넣어 둔 액자가 있는가 하면 야구장에서 직접 몸을 날려 낚아챈 공을 화려하게 ‘전시’해 두고 자랑할 정도다. 하지만 박 차장은 정작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한창인 지금(10월)이 가장 괴롭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두고 경쟁 팀 응원석에 앉아 경쟁자(D구단)를 응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그는 결혼 후 7년 만에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네 살이 되면서 야구장에 처음 데리고 갔는데 그때 D구단이 좋은 경기 모습을 보이며 8점이 넘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상대방 팀을 눌렀다. 이런 첫 경험 때문에 아들이 이때부터 D구단 팬이 됐는데 하필 이번 시리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팀과 D구단이 맞붙게 된 것.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뿐인 자식인데 뭘 못 해 주겠습니까. 다만 회사에서 팀 응원을 간다는데도 ‘몸이 아파 못 간다’며 피했는데, 야구장에서 회사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TV에 나와도 안 되기 때문에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가서 얼굴을 완전히 가리려고 합니다.”

◆딸 등하교 챙기다 금단현상 겪지만…

서울에 있는 금융 공기업에서 일하는 김 차장은 모두가 인정하는 ‘딸 바보’다. 매일 출근길에 막내딸을 직접 회사 어린이집에 맡긴다. 귀여운 딸을 직장 내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고 쉬는 시간에는 틈틈이 어린이집에 찾아가서 놀아주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점심 약속이 있을 때는 아예 약속을 취소하고 아이와 점심을 먹을 정도다.

딸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 좋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이 하나 있다. 좋아하는 술자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학 때부터 청탁을 가리지 않는 ‘주당’이었던 김 차장은 늦둥이를 본 후 술 마셔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회식은커녕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한 달에 한두 번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술자리가 줄었다. 가끔은 “손이 떨리거나 꿈속에서 혼자 몰래 술을 마시는 ‘금단현상’도 겪었다”고 털어놨다. 술 좋아하는 직장 상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맘에 걸리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술을 거의 안 마시게 되면서 살이 빠지고 혈색이 좋아진 건 상당히 바람직합니다. 무엇보다 아이한테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져’라는 말을 들으면 술 생각이 금방 사라지죠. 그렇지만 인간관계가 참 중요한 한국 사회인데 그 관계가 좁아지고 소원해지면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김병근/임현우/황정수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