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0건 이상 발생하는 대학 실험실 안전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실험자들의 부주의, 비좁은 실험 공간, 예산 부족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화재 진압 직후 각종 실험자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서울 지역 한 대학 실험실.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매년 100건 이상 발생하는 대학 실험실 안전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실험자들의 부주의, 비좁은 실험 공간, 예산 부족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화재 진압 직후 각종 실험자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서울 지역 한 대학 실험실. 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지난달 29일 오후 4시21분. 서울 광진구 능동로 세종대 태양전지실험실에서 1.5ℓ 석영용기가 파열돼 삼브롬화붕소(BBr3)가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브롬화붕소는 반도체나 전지 실험에 쓰이는 화학물질로 물과 반응하면 유독가스가 배출되는 독극물이다. 가스를 들이켜면 폐부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어서 당시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울 광진소방서 대원들은 즉각 인명 대피 통보를 했고, 학생 2000여명이 한꺼번에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국군 화생방사령부 24특임대대, 수도방위사령부 화학대 등 화학사고 전문부대들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고 사고 8시간 만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삼브롬화붕소는 끓는점이 92도로 상온의 액체 상태에서는 쉽게 기화되지 않지만 물을 만나면 격렬하게 반응하는 위험물질이기 때문에 자칫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안전사고 사각지대 ‘대학 실험실’

[경찰팀 리포트] '도심 화약고' 대학 실험실…화재·폭발·가스누출 매년 100여건
각종 위험 화학물질을 다루는 대학 실험실이 안전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다. 1999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 임시 건물에서 부주의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해 대학원생 3명이 숨진 지 14년이 지났지만 실험실 내 화재, 폭발, 가스누출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21일 관련당국에 따르면 최근 7년간 전국 대학 실험실에서 생긴 안전사고는 620여건으로 매년 100건 정도로 집계됐다. 3일에 한 번꼴로 사고가 일어나는 셈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전국 대학(347개) 실험실 안전예산도 학생 1인당 2000원에 불과하다. 실험실에 자동소화장치는 고사하고 소화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아 언제 대형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도심 화약고’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 19일 한국화학연구원 안전관리담당자와 함께 둘러본 서울 시내 이공계대학 실험실의 안전 실태는 심각했다. 서울 A대 화학과 실험실. 20~30명의 학부생들이 조별 실습을 진행하는 실험실에 들어서자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실험대 위에는 가스 노즐이 엉킨 채 놓여 있고, 옆에는 갈색 시약병과 비닐이 널브러져 있었다. 황산 등 위험 물질을 다룰 때 사용하는 후드(hood) 안은 각종 시약과 실험기구로 가득 차 있었다. 후드 밑은 각종 전선이 엉켜 있고 진공 펌프와 시약통을 아무렇게 모아 놨다. 후드 옆에는 발화하기 쉬운 육불화황(SF6) 가스통 등이 세워져 있었다.

이 관계자는 시약 관리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실험실 내부의 시약장은 낙하 방지대가 설치되지 않아 시약을 꺼내다 깨뜨릴 위험이 있었다. 후드 안에 시약을 모아 놓은 것도 위험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실험실에선 후드를 시약 저장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후드는 24시간 가동하는 게 일상적이어서 불꽃이 튀면서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 육불화황 가스통도 넘어지면서 상단 부분이 파손되면 대형 폭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한 담당관은 “고압가스통은 체인 등으로 벽에 고정해 넘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후드를 시약 보관 장소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안전 매뉴얼 없고, 보안경 안 쓰고

안전 매뉴얼조차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서울 B대 공학대학 실험실의 한쪽에는 각종 전공서적과 실험 도구가 한 곳에 뒤섞여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후드에 밀봉되지 않은 염산 등이 방치된 경우도 있었다. 경기 C대는 더 심각했다. 이날 오후 8시께 기자가 유기화학연구실로 들어가는 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학교 측은 늦은 밤까지 연구하는 날이 많아 실험실 문이 항상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염산, 황산 등 독극물이 있는 실험실에 외부인이 마음대로 출입하면 독극물의 범죄 악용 소지를 막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고 때 대처할 수 있는 시설도 드물었다. 화학물질이 몸에 닿았을 경우 씻어낼 수 있는 샤워시설, 가스 유출사고 때 착용하는 방독면 등은 꼭 필요하다. 대부분의 실험실에서 자동소화장치는 고사하고 소화기를 제대로 갖춘 곳도 찾기 힘들었다. 서울 D대에서 생명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황모씨(32)는 “대학원생들은 실험실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잠을 자는 경우도 많아 안전관리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 실험실 안전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실험자 부주의다. 서울소방재난본부가 분석한 전국 대학교 화재 발생 현황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397건 중 부주의 사고가 36.8%(146건)다.

분자생명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신모씨(27)는 최근 한 학부생의 DNA 실험을 지도하다 아찔한 경험을 했다. 실험하던 한 학생의 눈에 염화칼슘이 튄 것이다. 염화칼슘이 닿으면 피부가 상하고 눈에 들어가면 실명 위험이 큰데도 보안경을 쓰지 않았다.

실험실마다 취급하는 물질이나 기계가 달라 관련 지식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이 안전교육의 전부다. 정부가 파악한 2011년도 상시 연구활동 종사자 1000명당 연구실 사고 발생 건수를 보면 1000~3000명 규모의 전문·기능대학은 4.07명, 일반대학은 2.66명으로 연구기관(50~300명 규모)의 0.25명보다 최소 10배 이상 사고를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생 1인당 안전예산 2000원

정부의 대학 실험실 안전불감증도 심각하다. 정부의 2013년 연구실 안전환경 구축지원 예산은 27억3000만원. 지원 대상은 347개 대학 의 127만명, 국공립 민간연구소 연구원 34만명으로 1인당 평균 1700원을 지원받는 셈이다. 미래창조과학부가 관리하는 대학, 연구기관, 기업부설연구소는 모두 4700곳에 이르지만 관리하는 연구환경안전과 직원은 7명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체계적인 안전 관리와 사고 발생시 대응을 위한 연구실 안전환경 전문기관이 필요하지만 외부 위탁기관에 관련 사업을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 실험실 안전사고를 줄이는 첫 번째 방안으로 전문가들은 꾸준한 안전교육을 꼽았다. 이종호 원광대 소방행정학부 교수는 “학생이나 교수나 안전교육은 아무리 받아도 지나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전반적인 안전환경 교육과 실험별 교육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2012년 정부(당시 교육과학기술부)의 연구실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학의 연간 정기교육(12시간) 이수 비율은 49.3%에 그쳤다. 정부는 2006년부터 연구실 안전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을 시행했지만 정기검사 의무화, 사고 발생시 조사보고, 실험자들에 대한 보험 가입 등에 그치고 있다.

외국대학의 사례 - 실험동, 메인캠퍼스서 1시간거리…내부에 긴급 샤워·화재차단 시설

세계 1위의 공과대학으로 꼽히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성과 다르게 MIT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유해폐기물법·청정대기법·청정수질법을 100여건 위반했다가 15만달러의 벌금형을 구형 받은 적이 있다. 이후 MIT는 대대적인 실험실 안전관리 대책을 마련했고, 환경보건안전관리실(EHS)을 별도 운영하는 방식으로 대학실험실 안전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MIT의 실험실 안전관리는 큰 틀에서 환경보호에 목적을 두고 있다. 실험실에서 배출되는 유해물질 등의 관리를 통해 안전사고를 막고 유해가스, 폐기물도 동시에 관리하는 효과로 환경을 보호한다는 발상이다. EHS는 크게 △환경프로그램국 △환경보건안전국 △환경심의회 △환경보건안전심의회 등 4개 부서로 나누어 진다. 근무하는 직원 수만 75명으로 생물안전, 방사선안전 등에 대해 MIT의학국과 상호 업무협조를 이루며 대학의 안전관리를 진행하고 있다.

호주 명문대학인 퀸즐랜드대의 화학실험동은 메인캠퍼스(St Lucia)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고튼(Gotton)캠퍼스에 있다. 고튼캠퍼스 실험실 내부에는 긴급 샤워시설 및 화재 차단 시설이 갖춰져 있다. 실험대와 실험대 간 거리도 넓어 1인 1실험이 가능하고, 화학물질로 인한 사고가 생기더라도 피해 인원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대학 역시 안전보건업무를 맡는 산업안전보건 부서가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일본은 실험실 사고가 잦았던 나라 중 하나다. 1991년 오사카대에서 실란가스 폭발로 2명이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홋카이도대의 물리학과 실험실에서 질소가스 누출로 2명이 사망했다. 1980년에서 1993년까지 발생한 사고는 모두 161건으로 집계됐다. 이후 일본 대학 실험실의 위험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고, 일본은 2004년부터 국립대학에 대해 노동안전위생법을 적용해 근로감독 및 실험실을 엄격하게 관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도쿄대는 학생도 근로자와 같이 취급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우고 대학 실험 등에는 근로자 안전수칙에 해당하는 안전교육을 별도로 진행하고 있다. 또 모든 실험실에는 안전교육 기술지원을 하고 박사급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인력을 배치하고 있다.

박상익/김태호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