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내력과 가풍을 자랑하는 명문거족이 많다. 이들은 조상을 모시는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문중의 결속을 다져 나간다. 종가에는 문중이 절대적 권위로 떠받드는 종손이 산다. 종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온 집안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와 돕는다. 그러므로 수백년을 이어 내려온 종가는 우리 문화의 근간인 유교 사상이 실현되는 곳이며, 가훈과 예절이라는 전통문화의 마지막 보루다. 씨족에겐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는다. ‘종손보다 나은 벼슬은 없다’란 말이 생긴 이유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대개 기업의 역사와 아이덴티티를 담은 사옥을 가지고 있다. 삼성의 태평로 사옥, LG의 여의도 트윈타워, SK의 서린동 사옥 등이 대표적이다. 사옥은 수십조원에 달하는 그룹의 주요 정책과 경영 전략이 결정되는 장소다. 재벌을 현대의 명문가로 간주한다면, 그 건물들은 해당 그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가라 볼 수 있다.

삼성 태평로 본관 빌딩은 상아색의 외관이 돋보이는 입방체의 안정된 빌딩이다. 삼성을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킨 둥지이고 실질적인 사령부였다. 그룹 주력사인 삼성전자가 입주해 있었고, 또 돈(재무)과 사람(인사)을 장악한 삼성구조조정본부가 이 빌딩의 26~28층에서 막강한 파워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삼성 태평로 본관 빌딩은 ‘거북이 진흙으로 몸을 감추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의 터에 자리잡고 있다. 거북이 진흙 속에 빠지면서 발동한 토(土)의 기운은 다시 토생금(土生金)이 돼 재물이 솟는 복지가 된다. 또 이 빌딩은 26층이 분명하나 엘리베이터의 층수 버튼은 28층까지 돼 있다. 동양사상에 심취한 고(故) 이병철 회장이 동서양에서 꺼리는 4자와 13자가 들어간 건물 4층과 13층을 아예 없앴기 때문이다.

밀레의 만종을 감상하듯이 금실 좋은 부부가 서로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 LG 트윈타워는 인화(人和)란 가풍을 바탕으로 세계 초우량기업을 표방하는 LG그룹의 종가다. 그런데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여의도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라 원만하고 고귀한 생활을 하는 군자(君子)들의 땅이다. 왜냐하면 연꽃은 꽃과 열매를 갖춘 원만한 꽃이고,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피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의 상황에서 LG그룹이 세계 넘버원의 기업으로 우뚝 서려면 여의도의 지기를 비보해줘야 한다.

지상 36층의 SK 사옥은 고 최종현 회장이 혼과 정성을 바쳐 건설한 ‘SK의 총본산’으로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의 명당이다. 이런 터는 거북이 등으로 건물을 떠받치는 형국이 돼야 복을 가져오는데, 그 결과 빌딩 정면에는 거북 머리를, 뒤에는 삼각형의 거북 꼬리를 형상화했다. 네 귀퉁이에는 거북 발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또 거북 머리에는 ‘하늘 천(天)’자를 형상화한 8개의 흰 점을 찍어 놓아 제왕의 위엄을 나타냈다. 하지만 SK는 이 빌딩을 근자에 매각해 세인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풍수는 터에 의해 지기를 받기 때문에 주인보다는 입주해 사용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종가에 위기가 닥쳤지만 와신상담의 각오로 온 계열사가 매진한다면 거북은 곧 기운을 차리고 재물과 장수의 지덕을 발동해 한국 최고의 명문가로서 SK의 위엄을 되찾아줄 것이다.

고제희 < 대동풍수지리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