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한국 기업의 위상을 정작 실감하는 현장은 해외 여행지나 출장지다. 해외 곳곳에서 삼성, 현대자동차, LG의 즐비한 광고판만 마주쳐도 직감할 수 있다.

삼성의 경쟁력을 좀 색다르게 체감한 곳은 체코 프라하였다. 지난 9월 자유시장경제학자들의 향연인 ‘몽 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2012 총회’가 열린 자리에서였다. 스웨덴 싱크탱크 라티오연구소의 크리스티안 샌드스트롬 박사는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전쟁을 화제로 올리더니 “삼성은 왜 강한가”라고 물었다. 드높아진 삼성 실력을 인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라티오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민간 연구소다.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등을 거느린 스웨덴 최대 그룹 발렌베리도 연구비를 지원한다. 발렌베리는 5대에 걸친 가족경영 기업그룹으로 스웨덴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발렌베리와 같은 가족경영 특유의 리더십과 결단력, 추진력이 삼성 경쟁력의 요체”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희식' 소프트 경쟁력

삼성 경쟁력의 원천은 지난 1일 회장 취임 25주년을 맞은 이건희 회장의 경영 발자취에서 확인된다. ‘이건희식 경영’을 관통하는 핵심은 소프트 경쟁력 강화였다. 이 회장은 1993년 당시 삼성전자의 디자인 고문 후쿠다 다미오 일본 교토공예섬유대 교수가 작성한 보고서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후쿠다 보고서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의 토대가 됐다.

출발점은 제품 디자인 혁신이었다. 삼성은 1995년 삼성디자인학교(SADI)를 세우고, 세계 각지에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2002년 4월 혁신적 디자인으로 꼽히며 세계 시장에서 1000만여대가 판매된 일명 ‘이건희폰’이 첫 작품이었다.

이어 2005년 이탈리아 밀라노 회의. 이 회장은 “제품이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다.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라고 채찍질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는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21세기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해 와인잔을 본떠 디자인한 ‘보르도TV’가 출시 첫 해만 300만대 팔린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010년 출시된 이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갤럭시 시리즈도 소프트 경쟁력 강화가 낳은 열매다.

디자인 창의성 1위지만

세계 3대 디자인상인 iF디자인상을 수여하는 독일의 ‘인터내셔널 포럼 디자인’은 삼성의 디자인 창의성과 디자인 경쟁력을 각각 세계 1위로 평가했다. 현재 창의성 부문에서 삼성은 3160점으로 2위인 소니(2380점), 5위인 애플(1520점)보다 크게 앞서고 있다. 기업 전체 순위에서도 3080점을 얻은 삼성이 2위인 소니(2380점)와 5위인 애플(1520점)을 능가했다.

이 정도면 삼성의 창의력이 미래시장마저 선점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을까. 미국 경제주간지 배런스는 지난달 19일 ‘애플 대 삼성’을 주제로 한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애플과 달리 스마트폰용 반도체칩과 디스플레이 패널까지 직접 제조하는 삼성의 종합적 기업 경쟁력을 인정하면서도 최종 평가는 냉정했다.

배런스는 “애플과 삼성 간 (생존)게임은 궁극적으로 연구·개발과 디자인 경쟁력에 바탕을 두고 진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은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만들지만 애플은 우리가 원하는지도 미처 몰랐던 제품을 만든다”고 결론냈다. 이 회장에겐 삼성의 창의적 상상력이 여전히 목마르다는 일침이었을 것이다.

김홍열 국제부 차장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