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아이팟이나 아이폰, 아이패드 등 제품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핵심 부품은 삼성과 LG 등에서 사고 조립은 중국 폭스콘에 하도급을 준다. 본사는 컨셉트를 잡은 뒤 제품을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일만 한다. 2000년대 들어 애플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재도약시킨 아이팟은 MP3플레이어와 온라인 음원 판매를 연결하는 방식을 처음 도입해 세계적으로 3억대가 넘는 판매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 비즈니스 모델이 애플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디지털 음악 재생기기 벤처 기업을 하던 토니 파델은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해 여러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그를 알아보고 2001년 채용합니다. 그리고는 필립스, 웹TV, GE 등 여러 회사에서 인력을 스카우트해 35명의 전담팀을 맡기죠. 기본이 된 제품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포터블플레이어라는 기업을 파트너로 삼아 그 회사의 제품을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파델이 잡스를 찾아온 지 6개월 만에 아이팟이 탄생했습니다. 신제품이 만들어지기엔 아주 짧은 시간이죠.”

KAIST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AIM)가을학기 아홉 번째 시간. 김영배 KAIST 조직 및 경영전략 교수는 아이팟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경영 전략의 혁신 △개발 과정의 개방 △빠른 의사 결정 △파트너들과의 협업. 물건을 잘 만드는 것만큼 경영 전략을 잘 짜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소니의 몰락은 폐쇄적인 조직에서 시작

2000년대 애플의 아이팟이 있다면 1980~1990년대에는 소니의 워크맨이 있었다. 워크맨은 ‘걸어다니며 음악을 듣는’ 시대를 연 제품이었다. 하지만 소니는 누적되는 적자로 최근 신용평가회사 피치가 신용등급을 투자 적격등급의 마지막인 BBB-에서 세 단계 강등해 투자 부적격등급인 BB-로 매길 정도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소니는 하드웨어 제조 역량은 아직도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죠. 세계적인 음반회사인 EMI나 컬럼비아픽처스와 같은 영화사도 갖고 있으니 소프트웨어에서도 세계 정상입니다. 인터넷 사업도 하고 있고 전 세계 유통망도 있죠. 브랜드 인지도도 애플에 못지않습니다. 이런 회사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뭘까요. 조직이 폐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니 엔지니어 출신인 미야자키 다쿠마가 2007년 ‘소니 침몰’이라는 책을 통해 분석한 소니의 쇠락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소니의 인터넷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는 애플의 아이튠즈에 대패했고, 소비자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지만 소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과도한 권리 보호의식으로 작용해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소비자의 사용 편리성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기득권 세력이 요구하는 사양으로 사업 구조를 몰고 간 것이다.’

“시장의 리더가 되려면 단기적인 수익보다는 전체 생태계를 키우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합니다. 혁신 아이디어를 가진 외부 인물이나 기업들과 상생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죠. 단일 제품을 얼마나 혁신적으로 만드느냐보다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는 것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모든 구성원이 혁신의 원천’

김 교수는 혁신적인 조직이 되기 위한 요소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모든 구성원이 혁신의 원천이 돼야 한다 △남이 나를 위해 혁신을 하도록 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고객을 위한 혁신이 돼야 한다 △지속적인 혁신을 창출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조직이 돼야 한다 △리더는 혁신적 조직의 설계자가 돼야 한다 등이다.

“헨리 포드는 모델 T 자동차를 만들면서 분업의 원리를 극대화했죠. ‘나는 종업원의 두 손만 필요한데 왜 두뇌도 따라오는가’라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혁신이 중요한 이 시대에는 주도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 필수적이죠. 많은 회사들이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할 데가 없어서 투자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합니다. 직원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시다. 많은 경우 ‘창의성은 좋은데 효율성이 없다’는 이유로 묻혀버리고 말죠. 경영자가 이런 자세를 가지면 수익성은 좋아지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긴 어렵죠. 이런 경영자가 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긴 힘듭니다.”

◆‘외부 혁신을 활용하라’

혁신은 내부 자원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 외부에는 내부보다 훨씬 많은 자원이 있고,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예전에는 똑똑한 사람을 채용해서 연구·개발(R&D)을 시키고 R&D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상용화 가능한 것을 상품화했죠. 그 상품으로 번 돈으로 다시 R&D를 하고요. 그런데 가만 보면 R&D에서 나온 수많은 아이디어 가운데 자기 회사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지만 다른 회사에서 쓸 만한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겠죠. 제품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는 반면 R&D 비용은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아이디어와 혁신을 공유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김 교수는 이어 통신회사인 시스코가 1990년 이후 인수·합병한 기업 리스트를 강의실 앞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띄웠다. 100여개의 리스트가 올라왔다. 2000년대 들어선 매년 10개 이상의 기업을 M&A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시스코는 ‘R&D 대신 A&D를 한다’고 합니다. 자체 R&D 대신 인수(acquisition)를 통해 R&D를 한다는 뜻이죠. 실리콘밸리에서 쓸 만한 기술을 가진 벤처기업들을 적당한 돈을 주고 사들이는 겁니다. 자체 R&D 비용보다 적게 든다고 합니다.”

다국적 생활용품 제조업체 P&G의 ‘C&D’(connection & development)도 오픈 이노베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P&G의 대표 식품인 감자칩 프링글스를 기획할 때 원통형 포장에 동물 그림 등을 그려 넣으면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포장에 그림을 새길 수 있는 식용잉크 개발이 과제였다. 당초 자체적인 R&D를 통해선 개발 기간이 3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 회사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결과 이탈리아 볼로냐의 작은 빵집에서 식용 잉크 기술을 찾아냈고 개발 기간을 1년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P&G는 C&D 전략을 통해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2000년 4.8%에서 2005년에는 3.4%로 감소했지만 R&D 생산성은 60% 증가했습니다. 매년 50여종의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고요.”

◆‘외부 인재를 우대하라’

삼성이나 LG와 같은 국내 기업들도 기술과 특허를 가진 외부 기업을 인수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인수 대상 회사의 지식과 핵심 역량을 가진 인재들이 인수 이후 떠나는 바람에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한 사례가 많다.

“시스코는 M&A 전담부서가 있고, 이 안에 문화통합팀이 있습니다. 인수 대상 기업을 찾으면 문화통합팀이 그 기업이 시스코와 같이 융합할 수 있는 기업 문화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죠. 이 팀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인수 자체가 무산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더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문화통합팀을 과거 시스코에 인수됐던 기업의 임직원들로 구성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두 가지입니다. 인수되는 회사 직원들 입장에선 ‘인수된 회사 직원들이 핵심 부서에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며 반감이 줄어들게 되죠. 또 문화통합팀 직원들은 인수 대상 회사 직원들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겁니다.”

◆‘고객을 위한 혁신이어야 한다’

김 교수는 이어 크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의 ‘이노베이션의 딜레마’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했다. 기업용 컴퓨터에 쓰이는 14인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가 대세이던 시기에 작고 가볍지만 비싼 8인치 하드디스크(HDD)가 개발됐다. 14인치 HDD 시장을 잡고 있던 업체들은 ‘8인치를 개발할 비용으로 14인치나 더 싸게 만들어 달라’는 기존 고객들의 요구를 듣느라 8인치 개발을 소홀히 했다. 반면 신생 업체들은 8인치 HDD 개발에 집중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데스크톱과 노트북으로 소형화하면서 어느새 HDD 시장도 8인치 중심으로 개편됐다.

“들리는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건 들리지 않는 고객의 목소리입니다. 내 눈 앞의 고객보다 미래의 고객을 챙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벌어지는 혁신들은 사용자가 직접 해낸 경우가 많습니다. 유튜브와 페이스북 모두 개발자가 스스로 필요해서 만들어낸 작품들입니다. 최근 큰 인기를 끈 ‘꼬꼬면’도 개그맨 이경규 씨 자신이 먹기 위해 개발한 제품이죠. 물건을 팔기 위해서 하는 혁신과 사용하기 위해 하는 혁신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선도적으로 제품을 쓰는 사용자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잘 살펴보면 혁신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강의=김영배 KAIST 경영대학원 조직 및 경영전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