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지난 추석명절 때 고향에 내려갔다가 속상한 경험을 했다. 친척과 형제들이 볼 때마다 “회사는 괜찮냐? 다른 자리 알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다. 분위기 파악 못한 어린 조카는 “삼촌 회사 망했다며?”라며 큰 소리로 물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김 과장이 다니는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고 뉴스에 보도된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당장 월급이 깎인 것도, 해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다들 불쌍한 취급을 하니 못내 자신이 서글퍼진다.

중견건설업체 A사의 이 과장은 억지춘향격으로 샀던 회사의 미분양아파트에 대한 이자 때문에 매달 허리가 휜다. 지난해 어려움에 빠진 회사에서 공사비 충당을 위해 직원들에게 미분양분을 ‘강매’한 후 중도금 대출을 받게 했는데, 이 과장도 본인과 부인 명의로 2채를 떠안았다. 매달 나가는 이자만 300만원에 달하는 데다 월급도 몇달째 못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가다간 줄줄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할지도 몰라요. 하루하루가 겁이 납니다.”

고난의 구조조정의 시대가 다시 찾아오면서 눈물겨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김과장과 이대리들이 적지 않다. 불황에 밀려 법정관리나 화의를 신청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었고, 우량 기업들도 앞다퉈 감원과 함께 비용 감축에 나서고 있다. 대부분 1990년 말 외환위기 이후 입사 세대인 김과장과 이대리들은 요즘 구조조정 한파가 낮설기만 하다. 위기의 시대, 김과장 이대리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모아봤다.

[金과장 & 李대리] 법인카드 한도 '오버' 될라…저녁은 '언감생심' 점심 약속만

◆대출받은 돈 상여금으로 내밀어

한 중소 조선업체에 다니는 정모 대리는 지난 추석 명절에 신용카드 대출 서비스를 이용했다. 회사 사정이 악화되면서 명절 상여금이 안나왔는데, 상여금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에게 차마 그말을 하지 못한 것. 정 과장은 이 때문에 대출받은 돈을 회사 봉투에 넣고, 선물세트도 직접 사서 아내에게 “회사에서 받은 명절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속 사정을 모르는 아내는 흡족한 표정이었지만, 대출을 갚을 생각에 그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른 회사는 공연하는데…

“꼭 오늘 공연을 해야 되나요?”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선 D기업. 공교롭게도 법정관리 신청을 한 그날 같은 건물에 입주해있는 다른 회사가 사내 행사의 일환으로 밴드 초청 공연을 펼쳤다. A사 직원은 그 회사 관계자를 찾아 행사를 연기하면 안되냐고 문의했지만 초청 공연을 미루기는 곤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D사 직원들은 심란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건물 앞 공터에서는 밴드의 음악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왔다. “다른 회사들은 다들 행복한데 우리만 불행한 것 같아 더 참담하더라고요.”

◆아르바이트 학생이 어디 갔지?

증권사에 다니는 최 주임은 요새 회사에서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한다. 예전에는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 왔을 때 아르바이트 학생이 옮겨주었는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이들을 모두 내보냈다. 지금은 막내인 최 주임이 수십번 배달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다른 회사에 서류전달할 때는 예전같으면 거리를 막론하고 퀵서비스를 불렀지만 지금은 가까운 거리는 직접 전달해야 한다. 급할 때는 택시를 타야 하는데 물론 택시비 지원은 안된다.

◆한도 찬 법인카드

C건설사에 다니는 박 과장은 요즘 외부 약속을 잡기가 겁이 난다. 업황이 좋았을 때는 늘 빵빵한 법인카드를 가지고 여기저기 접대를 하고 다녔지만,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법인카드에도 한도가 걸렸다. 조금이라도 지출이 ‘오버’되면 본인의 지갑을 열어서 메워야 하는 것. 박 과장은 그래서 최근에는 비교적 금액이 적게 드는 점심 자리만을 고수하고 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거래처 사람들이 ‘술 한 잔’ 운을 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마냥 미루기만 하고 있다. “김치찌개 한 그릇에 소주 먹을 게 아니라면 당장 제 지갑이 털리는데, 어떻게 좋다고 나가겠어요. 잘나가던 그때 그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헤드헌팅 업체에 쌓여가는 이력서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곧 인력 구조조정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박 과장은 이직을 결심했다. 헤드헌팅 업체에 연락해 이력서를 냈더니 헤드헌팅 업체 직원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 또 OO사 직원인가요?”

박 과장 외에도 회사를 떠나려는 사람이 늘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등록한 것이다. 헤드헌팅 업체 직원은 “공급이 많으면 아무래도 가격이 떨어지게 마련 아니겠느냐”며 “최근 직장을 새로 잡은 이 회사 출신들은 대부분 연봉이 깎였다”며 미리 엄포를 놨다.

◆눈물의 메일들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면 으레 인력 감축에 들어가게 된다. 살아남는 이 차장과 떠나야 하는 김 부장 사이에 희비가 엇갈린다. 얼마 전 법정관리에 들어선 B사는 구조조정으로 떠나야 했던 직원들의 가슴 절절한 게시판 글이 화제가 됐다.

“IMF 때도 이렇게 춥진 않았는데…. 여섯살 아이 뒤척임 소리에 깨어 근심 걱정으로 잠 못 이뤘습니다. 이 한 몸 그만두는 걸로 회사 살리는데 도움 되길….”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게시판 글은 하루 수십 통이 쌓였다. 한 직원은 “한 통 한 통 답글을 쓰면서 ‘다음에 꼭 함께 일하자’고 다짐을 주고받지만…”이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김과장, 이대리 파이팅

중소 전자상거래기업 E사는 실적 부진에 직원 복지금액을 줄였다. 회식 자리에서 사장이 50여명의 직원들에게 사과를 했다. “여러분에게 미래를 함께 만들자고 약속해놓고 마음 아프게 해 미안합니다. 한동안 긴축에 들어가니 오늘만큼은 맛있는 거 맘껏 드시기 바랍니다.”

처음 메뉴로 소고기 등심을 주문하고, 사장은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자리를 떴다. 이후 직원들은 더 고기를 시키지 못하고 두 시간 동안 쓴 소주만 마셨다. 다음날 사장이 이 얘기를 듣고 다시 회식을 잡았다. 이번엔 돼지고기집이었다. “오늘은 돼지고기지만 1년 후 어제 한우집을 전세낼 겁니다. 1년만 파이팅합시다.” 사장의 말에 의기소침하던 있던 직원들도 덩달아 힘이 솟았다. 그들은 그날 돼지고기에 술잔을 기울이며 파이팅을 다짐했다.

고경봉/강영연/정소람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