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한 통의 놀라운 편지를 받는다. 예술 후원자로 잘 알려진 폰 메크 부인(1831~1894)이 매년 6000루블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하급 공무원이 받는 연 수입의 10배가 넘는 액수였다. 한창 작곡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 그로서는 모스크바 콘세르바토리의 교수직을 떠나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제안에는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단서가 붙어있었다. 작곡자가 후원자와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철도 사업가의 미망인인 폰 메크 부인은 남편의 사망 후 세상과 담을 쌓으며 은둔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에게 물려받은 사업에 간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무적인 부분을 아들 블라디미르에게 넘기고 자신은 주로 뒤에서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하기로 한 것은 그의 제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오시프 코테크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도 했지만 이미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시 ‘폭풍’을 듣고 감동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로서는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는 이런 행운을 선사한 폰 메크 부인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감사의 내용을 담은 의례적인 편지였지만 점차 친분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때로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토로하고 때로는 작곡에 얽힌 세부 과정을 알리기도 했다. 폰 메크 부인은 점차 차이코프스키에 있어 ‘감성의 애무자’ 같은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그가 부인과 관계를 지속했던 13년 동안 1200통이 넘는 서신을 교환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사실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고백하지 않았지만 동성애자였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에 대한 열망을 주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소할 수는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일종의 범죄행위로 간주돼 사회적 격리와 단죄의 대상이었다. 동성애는 곧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폰 메크 부인이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부인 역시 차이코프스키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미망인인 데다 은둔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그런 부분을 충족했으리라. 그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신체 접촉이 아닌 정서적으로 해결하는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만나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에게 차이코프스키는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고백한 데서 잘 드러난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와 만나지 않았지만 서신 교환만으로도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1890년 10월 갑작스레 종지부를 찍는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친밀한 내용의 서신을 교환한 두 사람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재정적 곤란을 이유로 더 이상 송금할 수 없게 됐다며 1년치 후원금을 앞당겨 지급했다. 이상한 것은 늘 우편으로 보내던 편지를 하인을 시켜 은밀하게 전달한 점이었다. 게다가 편지 말미에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 있는 문구를 남겼다.

두 사람이 결별한 배경을 싸고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추정 중 하나는 폰 메크 부인이 자식들에게서 차이코프스키와의 편지 교환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폰 메크 가의 자식들은 자금난에 허덕였는데 어머니가 동성애 음악가에게 적지 않은 연금을 지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따라서 관계를 지속할 땐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압박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부인이 서신을 우편이 아닌 하인을 통해 전달한 점은 이 가정에 무게를 실어준다.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로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차이코프스키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893년 11월6일 갑작스레 세상을 뜬다.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긴 했지만 콜레라균 감염에 의한 사망으로 귀결됐다. 공교롭게도 폰 메크 부인도 그로부터 두 달 뒤 폐결핵으로 그의 뒤를 따른다.

1979년 러시아의 음악학자인 알렉산드라 오를로바가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 대해 놀라운 견해를 발표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로 죽은 게 아니라 소년을 유혹하다 그의 아버지가 고발, 명예법정에 소환돼 자살을 언도받았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조카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열정을 비관해 자살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그러나 어느 의견도 그의 죽음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치명적인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차이코프스키가 교향곡 6번 ‘비창’을 완성한 9일 후에 세상을 떴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류 음악사상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이 멜로디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 그 안타까운 내막은 오직 차이코프스키만이 알고 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