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마케팅 부서장인 조 상무의 고향은 경남 마산이다. 명절 때마다 고향에 다녀오는 그는 차 막히는 걸 극도로 싫어해 늘 기차를 이용한다. 조 상무는 명절 귀성 기차표 예매가 시작되면 부서의 총무를 맡고 있는 강 대리에게 넌지시 부탁조로 지시한다. “강 대리, 이번엔 9월28일에 내려갔다가 10월2일에 올라오는 걸로 KTX 4장이야.” 코레일의 명절 열차표 예매는 이틀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딱 두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조 상무의 열차표 구하기에는 전 부서원이 동원된다. 모두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다가 홈페이지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광클 전쟁’에 돌입한다. 이러다 누군가가 성공했다는 단체 문자메시지를 받았을 때야 상황이 해제된다. “상무님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전 부서원이 동원돼 생난리를 친다는 걸 알긴 할까요.”

추석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김과장, 이대리들 중에는 명절 연휴의 설렘만큼이나 또 다른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추석을 슬프게 하는 것들’은 직장 상사부터 추석 선물까지 가지가지다.

○‘추석 영업’

식품회사 영업부서에 근무하는 황 과장의 고향은 충북 충주. 그의 부모님은 고향에서 과수원을 운영한다. 충주 사과를 비롯해 배, 포도까지 황 과장은 1년 365일 과일 걱정 없이 산다. 10년 넘게 영업부서에서 근무한 베테랑 세일즈맨답게 황 과장에게는 추석이 또 다른 성수기이기도 하다.

황 과장은 매번 그랬듯 이번 추석에도 팀원들에게 조용히 이메일을 보냈다. “이번 명절에도 충주 사과가 돌아왔습니다. 싸게 드릴 게요.” 처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사줬던 동료들도 해마다 반복되다보니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황 과장의 과일 영업은 그칠 줄 모른다. 특히 후배 직원들은 그의 끈질긴 종용에 마지못해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끝내 거부한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한다. “올해는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번 추석에도 결국 충주 사과를 선물로 사고 말았네요 ㅠㅠ.”

○서울 사람의 비애

중견기업 S사에 근무하는 정 대리는 지방이 고향인 동료들이 오히려 부럽다. 지방 출신들은 귀성·귀경 전쟁으로 곤욕을 치른다고 하지만 명절 때마다 당번을 도맡아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정 대리는 샌드위치 휴일인 내달 2일에도 일종의 당번격으로 출근해야 한다.

“정 대리는 싱글이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니까 추석 때 어디 안 가잖아. 정 대리 혼자 수고해주면 모두들 고향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겠어.” 팀장의 이 말에 정 대리는 한마디하고 싶다.

“서울 사람은 샌드위치 휴일 때 쉬지 말란 법 있습니까. 추석만 되면 지방 출신 여성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꼭 듭니다.”

대기업 직원 신 과장도 비슷한 경우다. “신 과장은 원래 서울 사람이지?” 팀장인 최 부장은 알면서 또 물어본다. 명절 때마다 듣는 질문에 신 과장은 이제 긴말 않고 바로 답한다.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명절 연휴 때마다 앞뒤로 휴가를 내 긴 휴가를 다녀오는 최 부장의 본가는 광주. 광주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광주다. 차라리 조용히 자리를 비우면 나으련만 최 부장은 명절 직전 최소 사흘 동안 신 과장을 괴롭힌다. 거래처와의 미팅과 까다로운 보고 등을 모두 자신이 없는 사이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최 부장과 함께 일한 3년간 명절만 다가오면 일 공포증에 걸리는 신 과장. 이번 추석엔 부모님께라도 따져보고 싶다. “왜 저를 서울 사람으로 낳으셨습니까.”

○상사가 서울 사람이라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대기업 L사 기획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고향이 서울인 이 팀장 때문에 추석 연휴 전날만 되면 울화가 치민다. 다른 팀은 팀장의 재량에 따라 명절 연휴 전날엔 대개 점심 직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일찍 귀성길에 나서기 위해서다. 하지만 고향이 서울이라 귀성길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이 팀장은 늘 여유만만하다. “길도 막히는데 뭐하러 고생하면서 고향에 가? 그냥 서울에서 푹 쉬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직원들은 집에 문자를 보낸다. “여보, 저 원수 같은 팀장 때문에 이번에도 밤에 내려가야겠어. 미안해.”

○‘맨날 김이야’

황 대리는 지난해 추석을 생각하면 아직도 민망하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그는 회사에서 큰 명절 선물을 받았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부피가 컸지만 무게는 솜털처럼 가벼웠다. 포장을 풀어보니 소금 간을 한 반찬용 ‘김’. 추석 아침 고향집에 모인 황 대리와 가족들. 차례차례 두 손 가득 가지고 온 선물을 풀어놓기 시작하자 황 대리의 고민이 깊어졌다. 저마다 “회사에서 받았다”는 선물들이 모두 그럴 듯해보였다. 한우에서부터 한과, 곶감, 하다못해 고급 햄 세트에 이르기까지. “사장님, 가족들은 회사에서 선물이라도 나오는 게 어디냐고 하지만 그땐 정말 차라리 안 받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남 부장은 명절 때면 거래처에서 보내오는 선물로 싱글벙글한다. 사실 거래처에선 남 부장의 직속 팀원들 몫까지 넉넉하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평소 욕심이 많은 남 부장은 절대로 팀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홍삼절편세트가 여러 개 들어왔으나 팀원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모두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값비싼 선물은 업체와 미리 통화해 자신의 집으로 배달받는 치밀함까지 보여줬다. 팀원들은 그런 남 부장이 밉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고 하죠. 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부장님만 닮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강경민/윤정현/김일규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