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 경방타임스퀘어 대표(47)는 먹는 게 일이다. 서울 영등포의 복합쇼핑몰인 타임스퀘어에 어떤 식당을 들어오게 할지를 늘 고민하기 때문이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의 맛집 유치경쟁이 가열되는 추세여서 더욱 그렇다.

타임스퀘어는 백화점, 마트, 호텔, 영화관, 대형 서점, 오피스 빌딩, 쇼핑매장 등이 어우러진 도심형 복합쇼핑몰이다. 지난달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장소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고객의 입맛을 잡기 위해 맛이 좋다는 집은 꼭 찾아가서 직접 확인한다. 미식가 수준을 넘어 전문가란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런 그가 자주 찾는 곳이 있다. 서울 이태원의 이탈리아 음식 전문점 ‘라쿠치나’다. 이 집과의 인연은 20년이 넘었다. 대학생 때부터 가족 생일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으면 자주 가던 곳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냈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단순한 식당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장소다.

지난 3월 부친인 김각중 회장이 별세한 이후엔 더욱 각별한 곳이 됐다. 김 대표는 자리에 앉자 “아버님이 이 집 음식을 참 좋아하셨다”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재벌 3세?…“반만 맞는 얘기”

김 대표는 음식이 나오기 전 하우스 와인을 한 잔 놓고 가족 얘기부터 털어놨다. 그의 조부 김용완 명예회장은 생전에 재계를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10년이나 역임했다. 부친인 김각중 회장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전경련 회장을 지냈다.

김 대표까지 3대째를 내려온 경방은 대한민국 최초의 면방직기업이자 국내 1호 상장기업이다. 외형상으로 크지는 않지만, 90년 넘게 장수하며 늘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상징적 역할을 해왔다.

아버지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경영자로서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자 출신인 아버님은 경영권을 잠시 위탁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계셨죠. 저와 형(김준 경방 대표)에게도 그런 식으로 하시곤 했어요. 그러니 저도 제 살길을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고요. 결혼할 때 아내에게 ‘나는 부잣집 아들이 아니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고(故) 김각중 회장이 ‘위탁받았다’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경방은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삼양사의 창업주 수당 김연수 회장 형제가 1919년 설립한 ‘경성방직주식회사’가 모태다. 1945년 광복 이후 매제인 김용완 회장이 회사를 넘겨받아 경영하기는 했지만 회사의 ‘주인’은 아니었다. 지분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삼양사가 대주주 역할을 하고 김용완 회장이 경영을 하는 구조였다. 2대째로 넘어가면서 김용완 회장의 아들 김각중 회장이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지분은 10%대에 불과했다.

얘기가 진지해질 때쯤 양파수프가 나왔다. 두툼하게 썬 양파의 질감이 새콤달콤한 국물과 어우러져 입에 감겼다. 이야기는 김 대표의 사회 초년생 시절로 옮겨갔다.

“대학 졸업하고 한동안 일본에 있었습니다. 기술력 좋은 일본 회사를 하나 잡아 물건을 떼다 국내에 파는 오퍼상 같은 것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외환위기가 터져 모든 게 바뀐 겁니다.”

외환위기는 그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았다. 김각중 회장은 회사가 어려워지자 둘째 아들인 김 대표를 불러 회사 경영에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김 대표는 주로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사 규모가 줄어들다 보니 새로운 사업모델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가 2001년 신규 사업으로 추진한 우리홈쇼핑이 첫 번째 작품이었다. 경방타임스퀘어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경방의 옛 공장부지를 활용해 복합쇼핑몰을 짓겠다는 구상에 대해선 당시만 해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영등포 일대는 낙후지역이란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김 대표는 “실패 가능성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회사 상황을 감안하면 당연히 했어야 하는 사업입니다. 그동안 새 사업을 너무 안 했잖아요. 타임스퀘어 개발이 10년이나 걸릴 일은 아니었는데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다 보니 의사결정이 늦어졌습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가 큰 고비였어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4개 시중은행에서 받기로 했는데 막상 돈이 필요한 시점에 돈이 나오지를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입점업체 유치에도 타격을 받았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오른 경방 최대주주

메인 요리로 나온 안심스테이크를 베어 물며 2006년 우리홈쇼핑을 롯데에 매각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은은한 고기향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타임스퀘어를 지을 돈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우리홈쇼핑을 팔고 나서 모두가 만족했습니다. 회사뿐 아니라 저 개인적으로도 큰 돈을 벌었죠. 지인들도 일부 투자했는데 그 분들도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그 돈으로 경방 주식을 샀습니다. 사실 많이 망설였어요. 당시만 해도 30대였는데 막상 돈을 손에 쥐니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고민 끝에 아버님께 ‘지분을 늘리겠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그때 다른 사업을 하겠다고 했으면 아버님이 많이 서운해하셨을 겁니다.”

김 대표는 2007년 동아일보 측으로부터 23만여주의 경방 주식을 353억원에 인수했다. 기존 11.15%였던 그의 지분은 20.95%까지 높아졌고 경방의 최대주주로 올랐다. 형 김준 대표와 특수관계인을 포함하면 지분은 53.48%에 달한다. 절반 이상의 지분을 확보함에 따라 경방을 둘러싼 경영권 이슈는 사라졌다.

김 대표가 조개와 마늘로 맛을 낸 봉골레 파스타를 건넸다. 쫄깃한 조개가 마늘과 어우러져 담백함을 더했다. 한 접시를 여럿이 나눠 먹으니 이내 빈 그릇만 남았다. 파스타 접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경방 투자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질문을 던졌다. 면방직 사업과는 별도로 유통사업을 떼어내 분리할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구도심 재개발해 제2의 타임스퀘어 설립"

김담 경방타임스퀘어 대표 "재벌 3세요?…내 사업 개척하는 디벨로퍼 입니다"
그는 “이전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주회사법상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올해 이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검토는 하겠지만 지난 3년간 함께 운영하다 보니 익숙한 점도 있고 해서 굳이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주식시장에서는 경방을 분리할 경우 면방직은 형인 김준 대표, 유통은 동생인 김담 대표가 각각 맡을 것으로 보고 있다.

투자자들에겐 경방 유동주식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 불만이다. 물량이 많지 않으니 사고 싶은 만큼 사기도 힘들고 팔기도 힘들다. “당초 주식배당을 해서 물량을 늘려보려 했는데 국제회계기준(IFRS)으로 바뀌면서 배당여력이 없어졌어요. 주식배당이 안 되니 무상증자도 검토하려고 합니다. 이럴 바에야 잔여 지분을 다 사들여서 자진 상장폐지를 하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도 했는데, 국내 상장 1호 기업이란 상징성을 생각하니 차마 그렇게도 못하겠더군요.”

◆경영자보다는 디벨로퍼…“디벨로퍼 시대 올 것”

김 대표는 스스로 경영자나 유통업자가 아닌 ‘디벨로퍼(developer)’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가 빈 땅에 타임스퀘어를 지어 올려 성공한 디벨로퍼이기도 하지만 기존 사업을 경영하기보다는 새로운 기회를 개척하는 것을 더 즐긴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는 또 다른 부동산 개발사업을 구상 중이다. 타임스퀘어야 경방이 보유한 땅을 개발한 것이지만, 앞으로는 남이 가진 땅을 개발해주고 이익을 나눌 생각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2010년 법인도 설립했다. 경방타임스퀘어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 만든 ‘제다이’란 회사다.

“땅만 있으면 대출을 받아 건물 올리고 분양해서 한몫 챙기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하우스 푸어’처럼 앞으로는 ‘땅 가진 거지’란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땅 자체보다는 어떻게 활용할지가 더 중요해질 겁니다. 그러자면 수익 분석부터 인·허가, 감리, 디자인 등을 복합적으로 맡을 전문화된 디벨로퍼가 필요해질 거고요.”

이미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제2 타임스퀘어 설립도 그중 하나다. 타임스퀘어와 비슷한 컨셉트로 서울 구도심을 재개발해 대규모 복합쇼핑몰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그는 “구체적인 후보지가 있고 어느 정도 논의도 마쳤다”면서도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을 아꼈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 가보면 10대 재벌 안에 꼭 디벨로퍼가 있어요. 그만큼 디벨로퍼의 역할이 중요하고 돈도 많이 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떤 분야든 바뀌기 시작하면 그 속도가 굉장히 빠르잖아요. 부동산 개발 분야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만간 국내 10대 재벌에 디벨로퍼가 포함될지 혹시 압니까.”

김담 경방타임스퀘어 대표 "재벌 3세요?…내 사업 개척하는 디벨로퍼 입니다"

김담 사장의 단골집 라쿠치나

정통 이탈리안 음식점…봉골레 파스타 인기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 맞은편에 있는 라쿠치나는 정통 이탈리안 음식점이다. 1990년 문을 연 뒤 인기를 끌자 2004년 강남 신세계백화점 10층에 2호점을 냈고 이후 스테이크 전문점 ‘더그릴’, 중식당 ‘베이징’ 등을 열었다. 2007년부터는 아시아나항공과 손잡고 1등석과 비즈니스석에 양식 메뉴를 공급하고 있다. 2008년에는 도미노피자와 사이드 메뉴를 공동 개발하기도 했다.

라쿠치나는 지난 22년간 인테리어를 크게 바꾸지 않아 오랜만에 찾는 사람도 예전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평일에는 주로 모임이나 비즈니스 미팅 손님이 많고, 주말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파스타 중에서는 봉골레, 스테이크는 페퍼 소스 한우 안심스테이크가 인기 메뉴다. 가격은 파스타가 2만원대 중반, 스테이크는 6만원 안팎이다. 점심은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저녁은 오후 6시부터 10시30분까지다. 연중 무휴로 운영된다. (02)794-6005~6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