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빙그레 사장(57·사진)의 집무실에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커피향도 흘러나왔다. 최고경영자(CEO)라기보다는 교수 집무실 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장은 최근 서울 정동 빙그레 본사에서 가진 한국경제신문 BIZ Insight와의 인터뷰에서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며 “빙그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서울대 인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AFP) 3기를 이수하는 등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

이 사장의 주문대로 빙그레 임직원들은 ‘글로벌 비즈’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문화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인문학을 통해 글로벌 식품기업을 향한 미래전사들을 키워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식품 수출을 위해선 그 나라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며 “바나나맛우유를 코카콜라 같은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령화·저출산으로 인해 국내 식품시장이 정체되고 있습니다.

“해외진출만이 돌파구입니다. 5000만명의 대한민국 인구는 전 세계 인구를 70억명이라고 볼 때 0.7%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0.7%의 한계를 넘어 99.3%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성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 한류열풍에 힘입어 해외 문화교류가 활발해져 식품기업이 진출하기에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고요. 빙그레를 비롯한 한국 식품업체들의 역량은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프라만 잘 갖춰진다면 국가경제의 신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달 초엔 ‘바나나맛우유’로 일본시장에 진출했죠.

“바나나맛우유의 일본 진출은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라 3~4년간 준비를 거친 것입니다. 우선 국내에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들르는 주요 루트에 일본어뿐 아니라 중국어로 ‘한국의 1등 바나나맛우유’라는 광고글을 노출해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귀국한 관광객을 중심으로 일본과 중국에서 입소문이 퍼졌죠. 관광가이드북에 ‘꼭 먹어봐야 할 한국음식’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초반 수요를 잡기 위한 전략이었죠. 다음은 인프라문제입니다. 식품산업은 유통기한 때문에 유통비가 많이 듭니다. 그래서 일본 시코쿠유업에 생산·판매를 맡겼죠. 까다로운 일본시장에서 유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바나나맛우유를 코카콜라 같은 글로벌 브랜드로 키울 것입니다.”

▶해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선 특별한 전략이 필요할텐데요.

“빙그레 수출담당자들은 그 나라의 문화를 철저히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식품은 그 나라의 식문화와 융합돼야 시장에 안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로나’도 현지시장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파트너십이 있었기 때문에 30여개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은 콜드체인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야 유통이 가능한 구조여서, 해외 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관리가 필요한 품목입니다. 메로나의 사례만 살펴봐도 빙그레가 얼마나 우수한 시스템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진출한 러시아 시장은 어떻습니까.

“꽃게랑은 러시아에서 대표 스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으로 유럽 시장을 여는 교두보가 될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유럽쪽이 그리스 사태 등 경제적으로 큰 변수들이 많기 때문에 당분간 무리하게 확대하는 것은 경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유럽 경제상황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진행해 나갈 생각입니다. 다만 동남아와 남미 등에는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잡힌 건가요.

“아직은 밝힐 단계가 아닙니다. 다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광물자원뿐 아니라 식품원료도 유럽이나 미국보다 부족합니다. 빙그레는 식품원료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는 CJ와 손잡고 필리핀에서 자일리톨 원료인 자일로스 생산에 참여했습니다. 전 세계 식품시장을 대상으로 한 이 사업은 앞으로 연간 300억원의 매출이 예상됩니다.”

▶국내 시장은 여전히 경쟁이 치열할텐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기 이익에만 매달려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랜드보다 당장의 이익에 집중하다가 쇠락한 국내 식품기업이 많습니다. 빙그레는 가능성 있는 브랜드에 집중하는 마케팅 전략을 썼습니다. 라면사업을 접기로 결정한 것도 중위권 브랜드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라면사업에서의 적자폭을 줄여 가능성 있는 핵심 브랜드를 키우는 데 집중했죠. 바나나맛우유를 대형마트에 집중시키는 등 유통시장 변화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1500억원대 장수 제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요플레는 떠먹는 요구르트 분야에서 1위로 자리잡았고, 투게더 메로나 등 빙그레를 대표하는 브랜드들도 이런 ‘선택과 집중’의 마케 팅 전략을 통해 더욱 단단한 시장 지위를 갖게 됐습니다.”

▶커피사업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사실 커피는 저랑 인연이 좀 있습니다. 저는 골프를 치지 않습니다. 대신 주말에 가족과 함께 맛있는 커피를 즐기죠. 강릉의 유명 커피집 ‘보헤미안’의 단골이기도 합니다. 지금 마시는 커피도 비서에게 제가 직접 드립법을 가르쳤죠. 국내 커피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겨냥해 2008년에 ‘아카페라(100% 아라비카 원두를 넣은 페트 커피음료)’를 내놨죠. 직접 커피공장을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곤 했습니다. 올해 예상 매출은 400억원대이고요. 새로운 ‘메가브랜드’로 자리잡은 거죠.”

▶얼마 전 임금협상을 무교섭으로 타결했습니다.

“1967년 창사 이래 임금협상을 무교섭으로 타결지은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노사가 꾸준히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건전한 노사문화를 발전시켜 온 결과로 봅니다. 사실 빙그레는 고용노동부 주관으로 선정하고 있는 ‘노사문화우수기업’에 2002년부터 전 사업장이 계속 선정되는 등 상생의 노사문화를 선도해왔습니다. 이번 무교섭 타결은 식음료의 여름 성수기 이전에 이룬 것으로 최상의 경영실적을 달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