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축구전쟁’이 벌어진 건 1969년 7월이다. 월드컵 예선전에서 온두라스 응원단 두 명이 죽자 온두라스인들이 보복으로 그들의 땅에 무단 정착해 살던 엘살바도르인 수십 명을 살해한 게 발단이었다. 격분한 엘살바도르는 육군과 공군을 동원해 온두라스를 공격했다. 해묵은 민족감정과 끊임없는 국경분쟁이 작용했지만 전쟁의 직접적 계기는 축구였다. 그로 인해 3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죽자사자 싸우다가 축구로 잠시 휴전한 경우도 있었다. 1967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지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터졌을 때다. 200만명이 굶어죽거나 학살당하면서 3년을 끈 내전이 딱 사흘 멈췄다. 정부군과 반군은 1969년 1월 휴전 사흘 동안 전투를 하는 병사는 총살하겠다고 공포했다.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팀과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친선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축구가 끝나자마자 양측은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전쟁까지는 아니어도 국가대항전에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건 예사다.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 잉글랜드 축구팬들이 프랑스의 상징인 수탉을 죽여 프랑스팀 골문 뒤로 던졌다. 숙적 프랑스를 반드시 이겨달라는 퍼포먼스였다. 그게 효험이 있었던지 잉글랜드가 3 대 1로 이겼다. 비 신사적인 행동이란 비난이 쏟아지자 잉글랜드 팬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프랑스도 영국의 상징인 사자를 죽여서 던져라.”

오는 23일 새벽 열리는 ‘유로 2012’ 독일-그리스 8강전도 전쟁을 방불케 할 것 같다. 구제금융 조건으로 혹독한 긴축을 요구하는 독일을 축구에서나마 꺾어주기를 바라는 그리스인들의 열망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2차대전 때 나치독일에 점령당했던 구원(舊怨)까지 겹쳐 있는 상황이다. 상대 전적에서 독일이 5승 3무로 월등히 앞서지만 ‘모든 것을 경기장에 쏟아붓겠다’는 그리스팀의 투지가 변수다.

하긴 축구에 빠진 게 그리스만은 아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빚을 잔뜩 지고 있는 나라들도 잇따라 8강에 진출하면서 흥분에 휩싸여 있다. 며칠 전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구제금융을 신청하자마자 자국 경기를 관람하러 폴란드로 날아갔다가 “나라가 거덜나게 생겼는데 축구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암담한 현실에서 축구에서나마 위안을 얻으려는 것일까. 하지만 위기의 당사자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더 열심히 일해야 도와주겠다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자꾸 어깃장을 놓고 있다. 그러면서 축구에만 열광하는 건 보기에 딱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