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오전,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 나들목 하부 공간. 인근 주민들이 테니스를 치고 농구장에선 대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농구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2010년 12월 유조차 화재 사건으로 이 일대 3개 도로가 3개월 동안 통제됐던 대형 사고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악몽의 사고 현장에는 이후 테니스장 농구장 양궁장 등 각종 체육시설이 들어서 깔끔한 체육공원으로 탈바꿈했다.

#. 같은 날 오후, 서울 한강로 지하철 4·6호선 삼각지역 고가도로 아래 공간. 널찍한 공터는 책 표지를 가공해 다른 공장에 납품하는 J 종이 공장의 부지로 불법 사용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실어내기 위해 쌓아둔 두꺼운 종이더미가 고가 상층부에 닿을 듯했다. 그 옆엔 절삭기를 가동시키기 위한 기름 탱크와 스티로폼, 박스, 폐자재 등 불에 타기 쉬운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종이 공장 바로 위에 왕복 4차로의 고가도로가 있고, 담 하나 사이로 지하철 1호선과 KTX까지 지나고 있어 자칫 화재라도 일어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고가 밑에는 고정 시설물(건물) 등이 들어올 수 없는데 무단으로 공장을 확장한 것 같다.” 단속 관청인 서울 용산구청 관계자의 무덤덤한 반응이 의아스러웠다. 인근 식당 주인 이모씨(58)는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넓혀 고가 밑까지 확장했다”며 “공장 주인이 한 달에 수백만원씩을 받고 임대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2010년 12월 고가도로 하부 공간에 불법 주차해둔 유조차 화재 사고로 3개월의 복원 작업기간 동안 시민들의 불편과 2280억원에 이르는 경제적 손실(한국도로공사 추산)을 가져왔던 서울외곽순환도로 부천 중동 나들목 화재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사건 이후 1년6개월이 지났지만 서울과 경기도 등 주요 고가도로 하부 공간의 불법 점유는 여전했다. 여전히 포장마차촌이 형성돼 있고 실체도 분명치 않은 온갖 단체들이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는 컨테이너박스가 쉽게 눈에 띄었다.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개인 불법 점유가 흔하다 보니 주인 행세를 하며 주차비를 챙기는 파렴치한은 애교 수준이다. 고가 하부 공간을 무단 점유해 공장 부지로 사용하면서 나머지 공간을 임대해 월세를 챙기는 ‘봉이 김선달식’ 사업자에게도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서울 고가 50곳 중 14곳, 경기도 절반 ‘불법 점유’

한국경제신문 취재팀이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시내 고가도로 50곳을 둘러보며 고가 하부 불법 점용 상황을 취재한 결과 14곳(28%)에서 여전히 불법 점용이 있었다. 김태원 새누리당 국회의원실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서울 시내 525개 고가 하부의 불범 점유시설 현황에서도 73곳(13.9%)이 불법 점유 상태였다. 경기도가 지난해 시·군과 함께 교량 아래 공간 점용시설 201곳을 점검한 결과, 53.7%인 108곳이 점용허가를 받지 않은 시설물로 조사됐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곳에 들어선 불법 시설물들이 화재에 무방비로 노출돼 대형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서울 중화동 중랑역 인근 철길 고가 밑 인도에는 천막으로 지어진 포장마차 11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포장마차마다 대형 LP가스통도 놓여져 있었다. 포장마차 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엔 불법 주차시설이 있었다. 고가 밑 부지는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

서울 용산전자상가 부근 고가 밑은 전자상가에서 나온 박스나 스티로폼 등을 쌓아두는 쓰레기 집하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 근처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직원들도 보였다. 용산 쓰레기 집하장에서 일하는 김모씨(44)는 “정부가 부천 화재 사고 직후 불법 점유 행위를 근절하겠다고 밝혔지만 그때뿐이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 봉담에 있는 KTX 고가 아래에선 고물상 2곳이 수년째 영업하고 있었다.

현행 법상 일반국도의 고가 밑을 개인이 점유, 이익을 취하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건물이나 고물상 등 시설물이 들어오는 것도 불법이다. 각 지방자치단체 허가를 받아 공영주차장으로 이용하는 것만 가능하다.

김 의원은 “현장을 둘러보니 달랑 소화기 1대만 있거나 대형 유조차가 주차된 곳도 있는 등 달라진 게 없다”며 “대형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매월 수백만원 버는 알짜배기 땅…단속 효과 없어

고가 밑 불법 점유가 부천 화재 사고 이후에도 좀체 사라지지 않는 건 허술한 감독당국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당국의 방치 속에 도심을 지나는 고가 아래 ‘알짜배기 땅’에서 나오는 짭짤한 수익을 노리는 불법사업자들이 몰려든다. 부천 화재 당시 중동 나들목 아래서 불법으로 주차장을 운영한 관리인은 한 달에 500만원가량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각급 도로를 관리하는 한국도로공사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단속에 나서도 폭력을 휘두르며 강력히 저항하는 것은 이런 불법 수익 때문이다.

중랑구청 관계자는 “철거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해도 근절이 잘 안 된다”며 “현장 단속 직원을 폭행하는 일도 잦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불법 점유가 관행처럼 되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한 관할 관청의 인식은 심각할 정도로 안이하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예방과 관계자는 “불이 붙을 수 있는 가연물을 법적으로 도로상에 둘 수 없어 화재 위험물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장 확인 결과 위험물이 아직도 고가 밑에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하자 “LP가스통이 위험하다면 각 음식점 도시가스는 어떡하나. 이것도 막아야 하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박영석 명지대 토목환경공학과 교수는 “(유조차가 아니더라도) 차량에 화재가 나면 상부 교량의 안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며 “한 시간 정도 불이 나면 콘크리트가 손상을 입고, 철근도 녹을 수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철거 전 유예기간에 소방시설 갖춰야

전문가들은 감독당국의 ‘참사 건망증’이 제2의 부천 화재 사건을 키울 수 있다며 관련 기관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경기도 용인시의 종합터미널 앞 고가도로 하부 공간 단속이 좋은 사례다. 불법 주차가 만연하자 지난해 용인시는 이곳에 차단막을 설치, 불법 주차를 ‘원천 봉쇄’했다.

소방 전문가들은 “행정집행 명령을 내린 뒤 유예기간을 두는데 이 기간이라도 지자체 차원에서 안전 소방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행 소방법상 포장마차나 고물상 등의 가건물은 방화관리자를 선임하지 않아도 된다. 소화기도 제대로 갖춰놓지 않은 곳이 많다. 이 같은 법의 사각지대는 고가 하부 시설물 관리에 치명적인 허점이다.

소방 관계자는 “정부가 소방법을 개정해 도로 등 주요 국가시설물에 접한 가건물에 대해서도 방화관리자를 선임하고, 전국 곳곳에 불법 점용한 시설물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는 등 체계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우섭/이지훈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