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를 버려라"…기업도 중앙은행도 '유로존 엑소더스'
“유로에서 탈출하라.”

각국 중앙은행과 기업들이 유로화를 내다팔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고 스페인 금융위기가 악화되면 유로 가치가 폭락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글로벌 기업들은 유럽 지점이나 점포를 줄이기 시작했다. 유럽 고객들과의 계약조건을 수정하는 기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제 통화를 바꾸거나 기간을 변경함으로써 유로 가치 하락에 따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규모는 작지만 유로존 회원국인 키프로스가 구제금융을 신청할 것이란 관측도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유로 내다파는 중앙은행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신흥국을 포함한 각국 중앙은행들이 유로를 팔아치우고 있다고 4일 보도했다. 지난달 말 유로 가치는 유로당 1.2356달러를 기록했다. 한 달 전인 4월 말의 1.3240달러에 비해 7% 떨어졌다. 월간 기준으로 작년 9월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유로 가치가 하락한 것은 중앙은행의 대규모 매도물량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리처드 코치노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외환전략가는 “1년 전만 해도 중앙은행들이 유로 급락을 막는 방패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매니저들도 유로를 멀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유로 가치 급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유로를 대거 사들였다. 사실상 유로 가치를 떠받치는 큰손 역할을 했다. 유로를 산 이유는 달러로 집중된 외환보유액을 다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럽 재정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유로를 처분하기 시작했다. 유로를 계속 들고 있으면 앉아서 자산가치를 까먹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FT는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당초 유로 자산을 40%까지 늘릴 계획을 세웠지만 위기가 확산되자 유로 자산을 팔고 영국 파운드, 호주 달러, 캐나다 달러 등으로 바꾸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5월 말 현재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보유한 외화자산 가운데 달러와 유로 자산 비중은 각각 60%, 25%가량이다.

○글로벌 기업들, 플랜B 실행 나서

글로벌 기업들은 유로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비상대책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둔 대책을 실행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로 발생할 수 있는 국가 간 신용거래 마비, 시민 소요 사태, 유럽 단일통화 붕괴 등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하이네켄은 그리스에 있는 현금성 자산을 대부분 처분했다. 하이네켄 관계자는 “손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그리스에 있는 현금성 자산을 대부분 팔았다”고 밝혔다. 하이네켄은 대신 미국 달러와 영국 파운드를 사들이고 있다. 세계 최대 주류업체 디아지오와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도 그리스 등 유로존에 있는 자산 비중을 줄이고 있다.

유럽 최대 컨설팅 업체인 독일 롤랜드버거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경우에 대비해 고객들과 계약을 체결할 때 추가 계약조건을 달기로 방침을 정했다. 컨설팅 수수료를 어떤 통화로 결제하며 어느 시점의 환율로 산정할지 등을 계약서에 명시하도록 한 것이다.

프랑스 유통업체 까르푸는 그리스 지점망 축소를 검토 중이다. 그리스인들이 소비를 줄이면 매출이 급감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식품업체 네슬레와 다논, 생활용품업체 프록터앤드갬블(P&G) 등은 그리스 재고를 줄이고 있다. 그리스에 들어가는 제품을 대폭 할인된 제품으로 바꿔가고 있다.

그리스 기업들은 더 다급하다. 유로존에서 이탈, 드라크마를 도입하더라도 은행과 신용거래를 할 수 있어야 계속 경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기업 경영자들은 국내외 은행 관계자들과 만나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최근 몇 주간 유로존 내 기업들의 체감경기가 크게 나빠졌다”며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게 되더라도 경기가 회복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라고 전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