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재판 사태 재연 조짐…파장 더 커질수도
근무평정 공정성 논란에 사회갈등 요인 중첩

서울서부지법을 필두로 서울중앙지법과 서울남부지법, 수원지법 등 수도권 주요 법원들이 속속 판사회의를 열기로 하면서 일선 판사들의 집단행동이 가시화되고 있다.

현재 중앙ㆍ서부ㆍ남부지법은 17일, 수원지법은 21일 단독판사회의 개최를 결의해둔 상태다.

이런 `릴레이 판사회의'는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사태 때도 전국 법원을 뒤흔드는 기폭제 역할을 한 바 있다.

따라서 서기호(42.사법연수원 29기) 판사의 재임용 탈락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가 근무평정제 개선 요구와 맞물리면서 사법파동으로 번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사태는 특히 근무평정과 재판독립 문제 외에도 일선 판사들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판,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표현의 자유 문제 등 첨예한 사회적 갈등 요인과도 연관돼 있어 폭발력이 전례 없이 커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판사회의는 `합법적 저항수단' = 판사회의는 수뇌부의 사법정책에 대항해 일선 법관들이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합법적 통로다.

연 2회 정례회의 외에 건의사항이 있을 때 구성원 5분의 1 이상의 요구로 소집된다.

판사회의는 각급 법원별 회의 외에 부장ㆍ단독ㆍ배석 판사회의 등 직급ㆍ부서별로도 열리는데, 이번 사태를 주도하는 판사들은 촛불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단독판사들이다.

이들은 비교적 가벼운 사건을 맡지만 재판장 눈치를 보지 않아 비교적 행동이 자유롭고 개혁성향이 강한 편이다.

2009년 5월 촛불재판 사태 당시에는 부당하게 개입한 신 대법관에 대한 대법원의 조치가 단순 경고에 그친 데 대한 반발로 서울남부지법에서 판사회의가 시작돼 불과 8일 만에 전국 17개 법원으로 확산됐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을 일컫는 이른바 사법파동은 그동안 다섯 차례 발생했다.

첫 파동은 1971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뇌물을 받은 혐의로 판사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이 공안사건 무죄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라며 집단 사표를 제출하면서 벌어졌다.

이후 민주화 요구가 거세진 1988년 소장판사 335명이 대법원장 사퇴, 정보기관원 상주 폐지, 청와대 법관 파견중지 등을 요구했으며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에는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판사 28명이 개혁을 촉구한 결과 법관회의가 처음 제도화됐다.

참여정부 출범 후인 2003년 8월 서울지법 북부지원의 한 판사가 남성 법원장만 대법관에 임명된데 항의하면서 불거진 네 번째 사법파동은 첫 여성 헌법재판관과 여성 대법관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근무평정 논란 포인트는 = 이번 사태는 외형상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 탈락에 의해 촉발됐다.

근무평정 하위 2%라는 사유로 부적격 통보를 받은 서 판사는 근무평정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끝내 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탈락 통보를 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서 판사의 탈락이 대통령 비하 등 반정부 언행에 대한 보복성이라는 의혹을 거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제히 판사들의 행동을 끌어낸 것은 법원장의 자의적 판단에만 의존해 철저하게 비공개로 이뤄지는 근무평정제가 재판과 법관의 독립을 해치는 독소가 된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직언을 했다가는 법원장 눈 밖에 나면서 평정이 나빠져 자칫 연임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사법부는 2010년 고법부장판사 승진제의 단계적 폐지를 선언하는 등 수직적 인사제도를 일부 손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선 판사 중 상당수는 투명하고 공정한 근무평정과 재임용 심사가 전제되지 않는 한 언제든 신분보장과 재판권 독립이 침해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씻어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복합적 갈등…폭발력 클 듯 = 법원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의 파장이 3년 전 촛불재판 사태를 능가하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재경법원의 한 판사는 "판사들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훨씬 큰 파장이 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직접적으로는 사법부 내부의 제도개선 문제이지만 FTA 반대, SNS 규제 등 복합적 갈등 요인도 내재돼 있다.

사태의 최초 발단은 인천지법 최은배(45.연수원 22기) 부장판사가 작년 11월 페이스북에 FTA 반대글을 올리고 같은 법원 동기인 김하늘(44) 부장판사가 현직법관 168명의 동의를 받아 FTA의 불공정성을 재검토할 것을 공식 건의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와중에 서 판사가 정부의 SNS 심의에 반대하면서 페이스북에 `가카 빅엿'이라는 표현을 써 논란을 일으키고, 창원지법 이정렬(42.연수원 23기) 부장판사가 역시 페이스북에 `가카새끼 짬뽕' 등 대통령 비하 패러디물을 올려 파장을 증폭시켰다.

대법원은 이 부장판사에게 정직 6개월의 중징계 처분을 내렸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 성향인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과 함께 사법부 내 이념ㆍ세대 갈등이 표면화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내놓는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