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꾀어 돈을 가로채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피해금액이 지난해 1천억원을 넘었다.

수법도 갈수록 다양하고 교묘해졌다.

`짜고 치는' 상황극도 연출된다.

두 차례 큰 선거를 치르는 올해는 여론조사를 빙자한 보이스피싱마저 활개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경찰청, 금융감독원 등이 31일 보이스피싱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내놓은 건 땜질식 처방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대책에는 다소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보이스피싱이 저질러질 가능성을 차단하고, 피해자 구제와 사기범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교묘해진 보이스피싱, 어디까지 왔나
2006년 국내에 발을 들인 보이스피싱의 `원조'는 자녀납치와 정부기관 사칭이었다.

범인은 인터넷 등에 떠도는 신상정보를 이용해 "자녀가 납치됐다"거나 "군인인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고 전화를 걸어 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보내도록 했다.

검찰, 경찰, 금감원으로 속여 피해자의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고 윽박질러 돈을 가로채거나 국세청, 우체국, 보험사 등으로 속여 세금 환급, 우편물 반송, 보험료 지급 등을 미끼로 사기를 저지르기도 했다.

대학 입시에 합격했다고 속여 등록금을 받아 가로채거나 메신저 정보를 해킹해 대화ㆍ쪽지로 급전을 보내달라고 하는 사례도 있었다.

최근에는 신용카드만 있으면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카드론이 주로 보이스피싱에 악용됐다.

카드정보를 알아내 카드론을 일으키고, 카드사가 피해자의 계좌에 입금하면 수사기관으로 속인 전화를 걸어 이를 `범죄자금'이라며 받아 가로채는 것이다.

은행원, 경찰관, 검찰 수사관 등 역할을 나눠 맡아 `분실된 신분증이 금융범죄에 악용된다'는 상황을 그럴싸하게 연출해 피해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일도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방지를 위한 관계기관 합동 태스크포스(TF)는 만기가 돌아온 대출금을 갚으라거나 아파트 분양대금을 입금하라는 식의 새로운 유형도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다.

TF 관계자는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는 여론조사를 위장해 전화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참여자 이벤트에 당첨됐다는 명목으로 경품 수령 비용을 보내라는 식의 보이스피싱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300만원 넘게 입금되면 10분간 계좌에 묶인다
이날 발표된 대책은 대다수 국민에게 금융 이용의 불편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TF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이 좀처럼 뿌리 뽑히지 않아 강도 높은 대책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의 피해사례는 지난해 파악된 것만 8천244건, 금액으로 1천19억원에 이른다.

1건당 피해금액은 1천236만원이다.

피해규모는 2007년 3천981건, 434억원에 비해 2배 넘게 커졌다.

가장 영향이 큰 대책은 범인이 곧바로 돈을 찾지 못하게 하는 지연인출 제도다.

300만원을 넘으면 돈을 보내자마자 바로 찾아가지 못하고 10분간 계좌에 묶이는 것이다.

보이스피싱의 피해사례 84%가 300만원 이상의 고액인 점, 범인이 피해자금을 찾아가는 시간이 통상적으로 입금 후 5분 이내인 점이 고려됐다.

은행 자체 감시로 의심계좌를 적발하는 시간까지 더해 10분으로 정해졌다.

지금까지 전화 한 통이면 바로 입금되던 카드론은 신청 절차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

신용카드를 만들면 자동으로 카드론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따로 카드론을 이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

자동응답시스템(ARS)을 통한 카드론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카드론을 일으키더라도 신청금액이 300만원을 넘으면 2시간 뒤에 입금된다.

카드론 보이스피싱의 피해자 72%가 2시간 안에 자신이 사기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에 악용되는 공인인증서 재발급도 제한된다.

TF는 공인인증서를 재발급할 수 있는 단말기를 3대까지만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지정하지 않은 단말기에서 인증서를 쓰려면 휴대전화나 OTP로 추가 인증을 받아야 한다.

◇대포통장 통합관리…발신번호 조작 차단 추진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다른사람 이름으로 만든 통장)은 일종의 `바늘과 실'의 관계다.

대포통장을 이용해 피해자금을 넘겨받아야 수사기관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TF는 `대포통장 통합관리시스템'을 만들어 기존에 지급정지 이력이 있는 고객이 계좌를 만들 때 신분확인을 강화하도록 했다.

지급정지 이력이 있다면 대포통장 개설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다.

은행권뿐 아니라 비은행권도 대포통장 의심계좌 정보와 모니터링 시나리오를 공유해 불법거래로 의심되는 계좌는 실시간 감시하기로 했다.

보이스피싱에 주로 쓰이는 발신번호 조작을 금지하는 법안 개정도 계속 추진키로 했다.

실제 수사기관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피해자를 속이는 사례가 적지 않은데, 발신번호가 조작됐다면 원래 번호가 뜨게 하거나 아예 차단하는 것이다.

금융회사와 공공기관 웹사이트에는 `개인화 이미지'(이용자가 미리 설정한 특정 이미지가 보이도록 하는 것) 적용을 확대해 가짜 웹사이트인 피싱사이트에 속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휴대전화에 보이스피싱 신고 프로그램(☎112, 118 연결)을 기본적으로 넣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 돈을 신속히 돌려주는 환급제도도 대출사기까지 포함하는 쪽으로 검토된다.

보이스피싱을 단속하는 전담수사팀은 수도권에 먼저 만들고 전국 지방경찰청으로 확대한다.

다음 달부터 3월까지는 보이스피싱 기획수사 기간으로 정해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고일환 홍정규 기자 koman@yna.co.krzheng@yna.co.kr